[카페 2030] ‘대가리꽃밭’과 속 빈 언어
‘분조장’(분노조절장애의 줄임말)을 앓던 밤이었다. 휴일에 야근하는 정도의 분노로 이해하면 된다. 청계천을 걸으며 회사로 돌아가던 길, 한 소녀와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강가에 앉아 돌 위에 케이크를 주섬주섬 올리고 있었다. ‘굳이 저기서?’ 생각이 꼬일 때쯤 익숙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트럼펫으로 가요를 연주하던 이가 생일 축하 곡을 즉흥에서 시도한 것. 모두의 시선이 케이크 위 촛불로 향했다. 짧은 무대가 끝나자,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소녀와 관광객의 행복, 직장인의 불운이 공존하던 그곳에 한참 머물렀다. 분노? 감동? 감정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그날의 촛불을 떠올리면, 새삼 우리의 일상과 언어가 차가워졌음을 깨닫는다. ‘T발 C야?’ 같은 유행어가 대표적.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는 MBTI 성격 유형인 ‘T(Thinking·사고형)’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욕설하듯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SNL 코리아’에 등장해 인기를 끄는 캐릭터 ‘대가리꽃밭’은 ‘이지적’이라는 상사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이지적이요? 하나도 안 쉬워 보이세요, 멋있어요!” 웃음 포인트는 혼자만 뜨겁다는 점. 엉뚱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데, 상대 배역은 생각한다. ‘얘 대가리꽃밭이네.’ 한 사람을 무시하며 상황이 마무리되지만, 경멸적인 시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부터 계속되는 경쟁 구도, 물질적 가치에 매몰된 분위기 속에 타인을 배려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다. 강남에서 30여 년 동안 정신병원을 운영 중인 김정일 전문의는 올해 들어 무차별 범죄가 많았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서로 말을 섞고 싶어하지 않는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는 어디에든 있지만, 사회 분위기가 사람과 공감하며 연민을 갖는 것과 멀어졌다.” 실제로 ‘말’의 문제는 ‘분조장’과 같은 표현에도 들어 있다. 타인의 올바른 감정 표현을 깎아내리거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의 연결 고리가 약해진 배경에는 이런 ‘속 빈’ 언어의 향연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는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아이의 탄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고동소리 아 아 저기 저기 아 아 아… 부드럽고 따뜻한 그 입술 사이 단단하고 하얀 그리고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겨 그리고 너는 그리 어여쁘구나.” 마침표 없이, 의성어를 섞어가며 이어지는 표현이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리내어 읽다보면 짧은 표현에 담기지 않는, 생명의 신비와 떨림이 느껴진다. 한림원의 선정 이유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했다”는 것. ‘속이 찬’ 언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침 올해도 파행으로 치달은 국정감사에서 봤듯, 제대로 된 말의 사용은 요원하다. 당연히 줄인 말을 쓰지 않거나 욕을 안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말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유머란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화가 날 때면 청계천의 악사(樂士)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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