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다시, 十月의 의미를 기억하며
현대사 아픔 녹아있는 참혹하고 거룩한 10월
김요아킴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순천대학 10·19연구소에서 시 원고를 청탁해 왔다. 여순 항쟁으로 인해 희생된 분들과 그 유족들을 위무하는 해원(解冤)의 노래를 추념형식의 창작집으로 발간하려는 취지다. 사실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로서 또 지역도 다르기에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시를 쓰기 위해 여러 역사적 자료와 구술 증언을 찾으면서 한편으로 유족들의 아픔과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해 완성된 시가 ‘불온-여수야화(麗水夜話)’인데 부제인 ‘여수야화’는 김초향이 가사를 쓰고 이봉룡이 곡을 붙여 1949년 가수 남인수가 부른 대중가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발표한 지 약 한 달 만인 9월 1일,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이 되어버렸는데 그 이유가 가사의 내용이 불순하고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대 최고의 가수가 부른 노래이자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비통함과 사회에 대한 답답함을 여성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표현한 노래였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은 이마저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예전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제주도 진압 출동 명령을 당시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의 좌익세력들이 주동이 되어 이를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킨 일종의 반란 사건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당시 여순 사건의 배경을 보자면 해방 이후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이 치열한 양상 속에 김구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의 꿈이 무산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정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부터 그 비극은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미군정에 의해 미곡수집령이 공포되어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농가로부터 무차별적으로 식량을 징발하는 강압적 정책이 이뤄지면서 수많은 농민의 생존이 위기에 봉착했고, 또 그 불만은 극도로 증폭되어 갔다.
이런 여타의 중첩된 시대상황으로 인해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일어난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좌익세력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군경과 토벌대에 의해 체포, 학살되는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었고, 이러한 모습은 여순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만다. 정부군에 의해 일주일 만에 강제 진압된 여수는 흔히 반란군이라고 말하는 세력에 동조한 민간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주먹밥이나 심지어 홍시 하나 건넨 이유로, 혹은 부역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일명 ‘손가락총’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주철희 여순사건 연구가에 의하면 1949년에 전남도가 발표한 당시 희생자 수가 1만1131명이라는 자료를 처음으로 찾아내었으며, 제주 4·3항쟁과 같은 방식으로 기간을 산정해 1948년부터 지리산 구빨치산 활동까지를 포함하면 희생자는 2만5000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국가의 무도한 권력 앞에 남도의 대지는 억울하게 산화한 붉은 피로 흥건해지고 만 것이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적 위기를 감지하며 좌익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국가보안법을 그해 12월 1일 제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고 보니 곧 다가올 10월 16일은 부산대 학생들로부터 촉발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정부 항쟁이 1979년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날이기도 하다.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정치탄압을 종식하고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로의 염원을 위한 이 시위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시민이 동참하면서, 18일에는 마산으로까지 확산되어 보다 격렬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인을 투입해 강도 높은 진압을 펼치면서 시위 가담자를 불법적으로 감금 폭행 고문하기도 했는데, 그 수가 무려 최소 1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위의 배후세력을 북한과 야당 정치인과 연계시키고 심지어 ‘마산 사제총기 사건’을 조작해 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몰락했지만, 부마항쟁은 이를 견인하는 주요한 원동력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꺾쇠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10월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잊히지 않을 비극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국가라는 권력 앞에 붉은 딱지가 붙여져 참혹한 고통을 감내해내야 했던 아픈 상처가 내재하고 있는 달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는 누군가의 말대로 十月의 ‘十(열십자)’는 즉 십자가의 의미처럼 타인과 시대를 위해 진정으로 희생된, 그래서 우리에게 더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의 마지막 구절이 그래서 더욱 구슬프게 들려오는 듯한 아침이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오늘엔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