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시사탐방] 연례행사 노벨상에 유감 있다면
지난주 내내 각 부문별 노벨상 발표가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에는 스웨덴 중앙은행이 수여하는 경제학상이 발표되었다. 이 ‘연례행사’에 호명된 사람은 그 업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꽤 많은 상금도 받는다.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연례행사에 유감이 있는 듯하다.
유감(遺憾)이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개운치 아니한 느낌은 건강에 좋지 않은데, ‘올해도 그냥 넘어갔구먼’ 같은 섭섭함이나 ‘이번 문학상은 우리 작가가 받을 만한데’ 같은 불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매년 ‘노벨상 유감’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오히려 이런 ‘노벨상 콤플렉스’가 유감이라서 그 상에 집착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그래서 노벨상이 우연히 제정되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이 죽자 상당수 신문이 “죽음의 상인, 마침내 죽다”라며 알프레드가 죽은 걸로 오보를 냈는데, 다이너마이트로 크게 돈을 번 그는 장차 자신이 그렇게 기억될까 봐 서둘러 노벨재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보를 낸 건 실제 사건이겠지만, 그것이 결정적 계기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노벨상 연례행사에 연례적으로 유감만 표할 게 아니라, 그것을 철저한 반성의 계기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특히 과학상과 연관하여 우리나라 과학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기초과학 분야에 적극적으로 연구·개발 지원을 하며, 젊은 과학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보장하는 연구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조언도 많이 한다.
그런데 노벨상에 대해 이런 특별한 유감이 원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필자의 학창 시절인 1960~1970년대에는 이 정도로 관심이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1990년대 말의 경제 위기를 넘어 여러 분야에서 국력이 신장되었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각별히 커졌던 것 같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도 하나의 계기였던 것 같다. 국력에 걸맞은 평가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 싶다. 그 평가 기준이 굳이 노벨상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국제적으로 갖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도 없으리라.
노벨상이 상인 이상 그 공정성에는 시시비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벨상은 1901년부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년 시상되었기 때문에, 상을 받은 수백 명의 학자 작가 정치인 시민운동가 국제기구 등이 지난 120여 년 동안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관점을 시사한다. 노벨상은 받기 위해 있기도 하지만, 공부하기 위해서도 있다. 사람들은 이 ‘사소한’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털어놓자면 이렇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나는 노벨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이 190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오이켄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나아가 철학자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경우를 찾아보았는데, 오이켄 이후로 세 명의 철학자가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27년 앙리 베르그손, 1950년 버트런드 러셀, 1964년 장 폴 사르트르가 그들이다. 사르트르는 문학 저술로도 유명한데, “작가가 제도화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상을 ‘정중히’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더해 1957년에 수상 이유로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탁월한 철학사상이 언급된 알베르 카뮈를 들 수 있다.
나는 이들의 사상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벨상에 대해 공부하다 이들의 저서를 섭렵하게 되었다. 베르그손은 내가 ‘열린 사회’ 이론을 정교히 구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러셀은 수학과 논리학뿐만 아니라 대중을 위한 철학 저술에도 힘썼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문장을 여기 적어본다. “철학적 사색은 우주를 두 적대 진영, 곧 동지와 적, 우호와 반목, 선과 악으로 가르지 않고 전체를 공평하게 본다.” 그러므로 사색은 “행위와 감정의 대상도 확대시켜 우리를 우주의 시민이 되게 한다”고 했다. 사르트르의 희곡 ‘더러운 손’은 정치행위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룰 때 핵심 화두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금도 공부에 참고하는 작품이다.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대할 때 카뮈의 철학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다시금 사유의 동반자가 된다.
주절주절 내 개인적 경험을 나열한 이유는 공부가 대상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리·화학· 생리의학상의 관점에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사를 담담히 살펴볼 수도 있다. 노벨상을 비판적으로 활용해서 공부하고 교육하는 일은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다방면으로 도움이 된다. 이에 언론 매체도 참여할 수 있다. 노벨상이 연례행사를 치를 때마다 인류의 현대사를 수상 분야별 업적의 내용이란 관점에서 해설하는 특집을 기획할 수도 있다. 상은 때가 되면 타는 것이고, 상을 활용하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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