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글로벌 인사이트] 대통령의 가장 큰 임무, 개혁이다

전성철 IGS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2023. 10.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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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개혁만 전담하는 ‘정책수석실’ 만들어
변호사 증원·로스쿨 등 첫 과제는 ‘사법 개혁’
법조인 반발과 ‘삼풍 참사’로 완결 못했지만
변호사 年 100명에서 지금은 2000명 시대로
국민에게 드릴 가장 큰 선물은 오직 ‘개혁’
대통령이 횃불 들면 국민은 반드시 호응할 것
일러스트=이철원

대통령이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위 ‘개혁’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미래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융실명제’ 하나가 우리 삶을 얼마나 단순하고 깨끗하게 만들게 되었는가?

문제는 ‘개혁’이라는 것이 이루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자들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다. 나의 실제 경험을 하나 소개해 본다.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고 대통령이 된 YS는 첫 1년 동안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등 대담한 개혁으로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 후 잠잠해졌다. 답답해진 그는 특단의 방법을 택했다. 바로 청와대 주도로 ‘세계화 추진 위원회’라는 개혁을 지향하는 민간 단체를 만들고 청와대에는 개혁을 전담하는 ‘정책수석실’이라는 부서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표적 개혁론자였던 서울대 법대 박세일 교수를 정책수석으로 임명하고는 그에게 정부 각 부처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로 실무진을 짜라고 했다. 박 수석은 에이스급 국과장들을 모았다. 우연한 인연으로 당시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박 수석은 공직 경험이 없는 나를 뜻밖에도 제1비서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책수석실 전체를 총괄, 조정하는 ‘부수석’ 역할을 하라고 했다.

박 수석 주재의 첫 회의에서 개혁 과제가 정해졌다. 바로 ‘사법 개혁’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문자 그대로 법조인들의 ‘천국’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20대 때 판검사로 시작하여 평생 ‘영감’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고귀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변호사가 되어도 변호사의 대단한 희소성 때문에 그들에게는 일감 걱정이 없었고 자연히 ‘서비스’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것은 의뢰인들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다음으로 미국 같은 ‘로스쿨제’로 변호사 양성 제도를 바꾸자는 데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즉시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정책수석실의 이 사법 개혁 이야기가 관가에 퍼지자 법조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불과 10여 명의 소위 ‘관료 나부랭이’들이 그 존엄하고도 ‘무서운’ 법조계에 ‘개혁’의 칼을 휘두른다? 그들에게는 정말 도저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모욕’이었다. 법원, 검찰이 보유하고 있는 인신 구속, 재산 몰수 등의 어마어마한 힘을 무시하는 정책실의 ‘작태’는 법조인들에게 모욕감과 함께 분노를 일으켰다. 그 분노하는 모습을 보는 우리가 느낀 공포감도 정말 만만치 않았다.

책임 비서관이었던 나는 밤새 고민한 끝에 팀원들과 의논해 정면 돌파 하기로 했다. 바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박 수석의 재가를 얻어 권오규(후일 경제 부총리) 비서관 팀이 총대를 멨다. 그들은 밤을 새워 며칠 만에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사법 개혁 백서’라 명명된 그 작품은 한 마디로 한국의 법률 서비스 현실을 선진국의 그것과 숫자 및 사례로 명쾌히 분석한 것이었다. 그것을 읽는 사람은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세계화 추진 위원회’ 이름으로 그것을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사에 보냈다. 그것은 사실상 법조계에 대한 정책실의 선전 포고였다.

뜻밖에도 그것이 거의 기적 같은 결과를 낳았다. 그 며칠 후부터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들이 동시다발로 ‘사법 개혁 시리즈’라는 것을 싣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모두 ‘국민의 편’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법조계라도 그 노도와 같은 시민들의 물결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법조계가 우리에게 협상을 제안해 왔다. 사법개혁 위원회가 구성됐다. 후일 대법원장이 된 양승태 고법 부장을 좌장으로, 법원·검찰·변호사 대표,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내가 참여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밀고 당기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노도와 같은 국민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법조계가 대폭 양보함으로써 1995년 합의가 이루어졌다. 평균 연간 100명 미만이던 당시 법조인 선발인원을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매년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 수준까지 늘린다는 것에 합의했다.

이제 로스쿨 문제가 남았다. 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했다. 대학들이 다 관여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삼풍 백화점’ 붕괴 참사다. 그 참사는 정권의 존재감을 ‘펑크난 타이어’ 같이 통째로 앗아가 버렸다.

법조계의 태도가 확연히 변했다. 로스쿨 개혁은 무기 연기하자고 요구해 왔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법조계를 더 압박한다는 것이 도저히 역부족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하고 있는 국민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연기에 동의했다. 대단한 좌절이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 좌절감을 극복하려고 나는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 10대 과제’ 등 다른 개혁에 열중했다. 그러나 박 수석의 좌절감은 좀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얼마 후 교육 담당 수석으로 옮겨 갔다. 우리 모두가 존경했던 그 수석이 사라진 상태에서 정책실의 의미를 못 느낀 다른 인재들도 하나둘씩 떠났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했던 것은 우리가 높이 올렸던 그 개혁의 횃불을 우리 후배들이 밝고 빛나게 키워 나갔다는 사실이다. YS의 뒤를 이은 DJ, 노무현, 이명박 등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으로 로스쿨 문제는 계속 조금씩 진전되어 나갔다. 2009년 드디어 첫 로스쿨이 개교했다. 지금은 무려 25개 로스쿨이 매년 2000명 정도의 새 변호사를 배출하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누구라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옳은 개혁이란 누군가가 진심으로 횃불을 들면 언젠가는 국민의 호응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아직까지 ‘개혁’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그가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 야당의 압도적 의석 우위, 불리한 언론 환경 등 현재의 상황 때문에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라 믿고 있다.

외교도 중요하고 경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선물은 바로 ‘개혁’이다. 문재인 정권이 남긴 잘못된 유산들을 포함해 이 나라에는 지금 너무나 많은 개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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