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4> 말테의 수기-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2023. 10.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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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인 릴케가 소설로 말한다 “받는 사랑은 덧없다, 사랑하라”

- 28세 말테라는 청년이 주인공
- 에세이 같은 단편 71편 엮어

- 베토벤·극작가 입센 고찰하며
- 각 죽음 재해석해 고유성 주고
- 고대 그리스 女시인 사포 통해
- 진정한 사랑은 ‘주는 것’ 설파

- 인간의 숙명인 고독과 절망
- 떨쳐 일어나 실존하길 일깨워

염천 더위가 가시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때론 날씨가 생각을 움직이는데, 요즘이라면 릴케가 쓴 ‘가을날’이란 서정시가 혀끝을 스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들판에는 바람을 주소서.’ (1연)

1902년 7월 저자는 새파란 27세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1862~1946)을 ‘추앙’했나 보다. 그에게 ‘형상 시집’을 바친다. 여기에 총 3연인 이 시가 보인다. 마지막 연.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고독한 사람은 내일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그리고 낙엽이 뒹굴면, 불안스레/이리저리 가로수길을 헤맬 것입니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받는 사랑은 공허하고, 주는 사랑에서 인간 실존이 창조된다며 여러 인물을 소개했다. 고대 여성 시인인 사포가 그중 한 명. 시인 알카이오스가 리라를 연주하자 사포가 턱을 괸 채 감상하고 있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작.


▮ 인간 실존 대한 질문과 사색

형상 시집을 펴낸 2개월 뒤 릴케는 파리로 간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을 만나기 위해서다. 시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1년여 전인 1901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결혼했다. 아내는 로댕 제자였던 클라라 베스트호프(1878~1954). 그녀가 릴케에게 귀띔한 내용. “릴케, 로댕은 사물 본질을 탁월하게 읽어내. 그걸 형상으로 조각해.” 릴케는 로댕에게 그 비법을 배워 시를 가슴으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싶다. 릴케는 2개월여 로댕 작업장을 드나들며 전기 ‘로댕론’을 써냈다.

릴케는 이때 파리 툴리에 거리에 자리 잡은 허름한 호텔에 묵었다. 시 ‘가을날’ 3연 속 인물처럼 지냈으리라. 그 체험은 활자로 변한다. ‘이 작품을 쓰고 죽어도 좋다’라고 말한 그 작품,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1910년)다. 집필 기간은 1904년 2월~1910년 1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펴냈다. 자기 얘기를 한 듯하다. 독일어로 쓰인 첫 현대소설. 왜냐면 인물과 사건 위주인 이전 사실주의 소설과 꽤 다르기 때문. 현대성(모더니즘)이 도드라져 낯설다는 독자가 많았다.

릴케는 성서를 갖고 다니는, 신을 경배한 작가였다. 이 소설은 종교와 이성, 삶과 죽음, 고독과 사랑을 재해석하고 성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 게 힘들지, 제대로 사는 걸까. 이른바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릴케 사색을 만난다.

릴케가 로댕을 찾아 파리로 왔듯, 이 소설 주인공인 28세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도 그랬다. 말테가 작가 지망생이란 점만 다르다. 말테는 부유한 덴마크 귀족 가문에서 자란 청년이다. 팔짱을 끼고 파리를 본다. 이 소설 첫 문장이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 비정한 대도시다. 인간을 소외하고, 삶엔 고독 죽음 공포가 가득하다. 남녀노소 병자가 거리를 비틀대며 걷는다. 골목은 요오드포름과 감자 기름에서 나온, 뒤섞인 악취가 진동한다. 불안·공포를 부르는 냄새다. 거리는 소란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섬뜩하다, 폭풍 전야처럼. 아우성이 밀려오기 전 징조.

▮ 소외와 고독… 비정한 대도시의 삶

릴케는 1900년 5월 7일~8월 24일 루 살로메와 두 번째로 러시아를 여행했다. 왼쪽부터 릴케, 루, 러시아 시인 스피리돈 드로진.


파리에선 비참하고 비루하게 죽는다. 대형 병원 병상에서 임종을 맞으면 별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죽으면 안 되는데도. ‘죽음은 살다가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죽음이 시작되니까. 삶이 형태를 달리한 게 죽음이다. 저마다 삶은 고유하기에 존중받는다. 죽음도 그러해야 한다. 말테가 어린 시절 본 할아버지 죽음은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죽음의 주인이었다.’

인간은 고유하게 죽고, 그 방식도 선택하는 게 마땅하다. 죽는 방식은 질병이 결정한다. 파리 같은 대도시 속 죽는 과정은 공장에서 공산품이 생산되는 절차와 흡사하다. 죽음이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리면 누구나 똑같이 자동으로 처리된다.

말테는 대도시 삶을 들여다본다. 파리엔 “사람도 많지만, 얼굴은 더 많다. 누구나 여러 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을 몇 년씩이나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 얼굴 속에 도사린 진짜가 무엇인지 두렵다.

에세이 같은 이 소설엔 고독·절망과 사투를 벌인 인물들이 나온다. 악성 베토벤(1770~1827). 말년에 귀가 멀었다. 음악가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인가. 말테 생각은 다르다. 베토벤 데스마스크를 보고 이렇게 썼다. “불분명하고 덧없는 소음에 현혹되지 않도록 신이 베토벤의 청각을 막았다.” 이 거장을 묘사한 대목은 시구 같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 실존을 이뤘다.

명성은 모래성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1828~1906)이 그랬다. 그가 내놓은 무대를 세상이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말테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대, 가장 고독한 사람, 변두리에 있는 자여.” 명성은 자신을 물어뜯는, 우리에서 나온 ‘무서운 맹수’이다. 아니면, 형성돼 가는 한 존재가 세워지는 작업장에 군중이 밀치고 들어와 돌들을 함부로 옮겨 놓는 공개적인 철거와 같다고 봤다.

호텔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말테는 무섭다. 불타는 하찮은 촛불조차 자신을 모른 체 한다는 느낌. 이럴 때 창문을 바라보며 희망을 찾는다. ‘저기 바깥에는 뭔가 아직, 지금도 이 갑작스러운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내 것이라 할 게 있을 거야.’ 하지만 곧 깨닫는다. 저 바깥세상은 여전히 무심히 흘러가고 고독만 남았다는 걸.

릴케는 죽음을 재해석해 고유성을 부여하고 로댕 조각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작가 펠릭스 아르베르(1806~1850). 그는 병원에서 자신 임종을 지키던 수녀가 ‘복도’를 ‘콜리도어’라 발음하자 ‘코리도어’가 바른 발음이라고 지적한 뒤 ‘편안하게’ 죽었다. 이 정도면 고유하게 죽었다.

▮ 절망을 딛고 ‘새롭게 보기’ 제안

릴케는 사랑을 어떻게 봤나. 사람들은 사랑받기에 익숙하지만 “사랑받는 사람들의 삶은 나쁘고 위험하다. 아아, 그들이 자신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썼다.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인 사포,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비블리스, 12세기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음유시인을 사랑했던 여성 시인인 디 백작 부인, 13세기 프로방스 여성 시인 클라라 당두즈를 예로 들었다. 사랑받으면 한순간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으로만 남으면 어떻게 되나. 릴케는 ‘언제나 보석이 사라진 보석함처럼 앞날이 텅 비어 있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이 고전 원고 귀퉁이에 쓴 문구. ‘사랑받음은 불타 버림이다. 사랑한다는 건 소진되지 않는 기름으로 빛을 낸다는 것이다. 사랑받음은 덧없음이요, 사랑함은 지속이다.’

이 고전은 71개 단편으로 짜였다. 소제목은 2개만 달렸다. 첫 글이 ‘9월 11일 툴리에가에서’, 40여 쪽 넘기면 나오는 단편이 ‘국립 도서관’이다. 단편 분량이 들쑥날쑥하고, 내용 역시 이어지지 않는다. 서술 방식도 파리 팡테옹 같은 유적에 대한 단상, 메모 시 일기 편지글 전기 독후감 등으로 다양하다.

릴케는 이를 두고 ‘졸렬한 통일성’이랬다. 거대하면서도 다양한 현대 문명이 지닌 속성을 읽어낸 데서 나왔다. 현대인 삶을 내다봤다. 한눈에 파악할 수도 없고 낯설어 불안을 느끼고 왜소해져 살아가는 모습 말이다.

릴케는 넋두리만 늘어놓지 않는다. 절망하지 말고 ‘새롭게 보기’로 극복하자고 제안한다. 마지막 글에서 ‘돌아온 탕아’ 얘기를 인용하면서. 사랑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온 세상을 사랑하려는 탕자. 저자는 참혹한 세계 1차 대전과 현대 문명을 지켜보며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10여 년 붓을 꺾었다가 글쓰기로 스스로 치유해 살아났다. 고독과 절망은 인간에게 숙명이지만 그 서릿발을 밟고 일어서야 인간은 실존한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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