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風水를 믿지 마세요

유석재 기자 2023. 10. 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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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흥망성쇠는 땅의 기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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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예산시장에서 열린 맥주페스티벌을 점검하고 있다. /백종원 유튜브 캡처

최근 인터넷 매체에 재미있는 칼럼이 하나 떴습니다. 외식사업가 백종원씨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산시장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 인파가 몰리는 상황에 대해서 한 풍수지리 전문가가 이렇게 분석한 것입니다. ‘예산시장 터는 지세(地勢)가 약한 곳으로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꽃돼지 상 인물 한 명(이 대목에서 조금 웃음을 참았습니다)이 나타나 성공을 이끌었다. 꽃돼지 상 인물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돈을 번다. 귀인이 명당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땅이 운명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기운을 얻은 사람이 그 운명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관상? 그것도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식’인 것처럼 알고 있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경기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 영정.

(1)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궁궐을 동향(東向)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북악산 주산, 남향 궁궐’을 주장해 관철됐다. 무학대사는 ‘이제 200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라 걱정했는데 과연 조선 건국(1392) 꼭 200년 뒤(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2)19세기, 왕족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은 부친 무덤을 충청도 덕산으로 이장했다. 한 지관(地官)이 ‘무덤 주인은 화를 입겠지만 후손 중에서 천자(天子·황제)가 두 분 나올 땅’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흥선군의 아들(고종)과 손자(순종)는 훗날 황제가 됐지만, 남연군 묘는 1868년 독일인 도굴꾼 오페르트 일당에게 파헤쳐졌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일단 각 이야기의 마지막인 ‘조선 건국 20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종과 순종은 황제가 됐지만 남연군 묘는 오페르트 일당에게 도굴당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있었다는 일과 과연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버전에서는 무학대사가 깊은 한숨을 쉰 뒤 절로 은거해 버리는가 하면(중이 절에 들어가는 게 뭐가 이상하지?), 흥선군이 웬 노인에게 이런 얘기를 듣고 나서 ‘그런데 노인장!’하고 돌아보니 그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 뒤였다는 이야기까지 들어 있습니다. 아아 신묘하구나.

무학대사 이야기와 남연군묘 지관 이야기는 풍수와 택지(擇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듯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믿을 만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훗날 임진왜란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일어나자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겼나’를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윤색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21세기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땅만 잘 고른다면…’이란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직후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풍수나 무속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냐’는 비난을 하고, 기자회견장에서조차 그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여당 비대위원장은 “용산은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주둔했던 오욕의 역사가 있는 곳”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따진다면 청와대 부지는 어떻습니까.

1979년 대통령이 그 앞 안가(현 무궁화동산)에서 저격당했고, 1939년엔 총독 관저가 지어졌으며, 1895년엔 담장 하나 넘은 건청궁에서 왕비가 시해당한 ‘오욕의 장소’가 아닐까요.

현 정부와 인수위 모두 한때 이전을 고려했던 광화문은 또 어떻습니까. 1926년엔 그 뒤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세워졌고, 1896년 아관파천 때는 그 앞에서 총리대신 김홍집이 군중에게 살해당하고 시신마저 훼손됐던 엽기적인 사건의 장소입니다. 그 ‘군중’이란 고종이 사주한 보부상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어디가 길지(吉地)고 흉지(凶地)란 말인가요.

용산 대통령실 청사 전경. /뉴스1

정작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땅이 관점에 따라 길지도 흉지도 될 수 있고, 풍수는 국가의 흥망과 인과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도로 유연하게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참담한 전란과 도굴 사건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건물이나 무덤을 잘못 만들어서였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라가 국제 정세 변화에 무지했고 국방과 외교에 소홀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던 것입니다.

역대 청와대 입주자 대부분이 불행한 말로를 맞았던 이유는 터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그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지’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정치의 성패(成敗) 여부가 아니겠습니까. ‘풍수’를 정치와 연결해 악용하는 일은 이제 제발 좀 그만둘 때가 됐습니다. 그다지 ‘좋지 않은’ 풍수에 개의치 않고 고향 시장으로 전국의 사람들이 몰리게 만든 백종원씨처럼 말이죠.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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