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하는 기자] 부고의 잉크는 마르지 않는다

박희준 2023. 10. 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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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은 지붕의 냄새를 닮았겠다 그들이 떠난 집은 그레이스케일 조간신문을 찢어 먹은 뱃속에는 죽은 이름들이 발인 순서대로 모이고 흑백의 테두리에서 아침을 맞은 그들은 밝아지지 않는다 지붕의 몸짓을 배우는 오전 생존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색깔을 되짚을 것이다 접힌 신문을 펼쳐 간밤에 작별한 이름을 지붕에 널어둔다 잉크가 덜 마른 쪽광고 부고처럼 해 뜨기 전의 연노랑은 모르는 죽음을 알리기에 적당하다 저절로 벌어지던 당신의 아래턱을 닫을 때 밤은 갔고 당신의 냄새는 지붕에서 증발했다 가벼워진 이름의 값을 누구도 묻지 못했다 조간신문이 우비를 입고 왔다   - 최은묵, 부고는 광고보다 작다, 『내일은 덜컥 일요일』, 2022, 시인의일요일 나이가 든 증거라고 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에서 "지붕"을 쌓는 계절,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죽음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 "접힌 신문을 펼"치기 전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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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준 편집부 차장

달맞이꽃은 지붕의 냄새를 닮았겠다

그들이 떠난 집은 그레이스케일

조간신문을 찢어 먹은 뱃속에는 죽은 이름들이 발인 순서대로 모이고

흑백의 테두리에서 아침을 맞은 그들은 밝아지지 않는다

지붕의 몸짓을 배우는 오전

생존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색깔을 되짚을 것이다

접힌 신문을 펼쳐 간밤에 작별한 이름을 지붕에 널어둔다 잉크가 덜 마른 쪽광고 부고처럼

해 뜨기 전의 연노랑은 모르는 죽음을 알리기에 적당하다


저절로 벌어지던 당신의 아래턱을 닫을 때 밤은 갔고 당신의 냄새는 지붕에서 증발했다

가벼워진 이름의 값을
누구도
묻지 못했다

조간신문이 우비를 입고 왔다

 


- 최은묵, 「부고는 광고보다 작다」, 『내일은 덜컥 일요일』, 2022, 시인의일요일



나이가 든 증거라고 했다. 축의금보다 조의금 봉투를 더 많이 챙긴다는 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에서 “지붕”을 쌓는 계절,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죽음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 “접힌 신문을 펼”치기 전이기 때문일까. 한날한시 공평하게 전달되는 부고는 “해 뜨기 전의 연노랑”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자위한다. 펼치고 싶지 않은 지면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찬 바람이 불고 있지만 나는 그해 여름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날로 자주 소환된다. 한창 바쁜 시간에 전달받은 부고 문자. 며칠 전 ‘밥 한번 먹자’는 그의 문자에 ‘네 조만간 연락드릴게요’라며 무심하게 보낸 답장에서 멈춰 있는 액정처럼. 눈앞이 캄캄해지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먹먹한 기분. “저절로 벌어지던 당신의 아래턱을 닫”은 가족들의 참담한 심정을 “생존한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부고는 먹색 신문의 가장 먹먹한 부분이다. 신문을 집어 들면 스쳐 지나가더라도 한동안 눈길이 머물게 되는 부고. 고인의 수십 년의 생을 단 몇 줄로 정리한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면서도 “죽은 이름들이 발인 순서대로 모이”는 부고는 정해진 형식에 맞춰 가지런히 나열된다. 그게 고인에 대한 마지막 애도라고 믿는 사람들 손에서, 부고는, 마지막 목소리를 전한다.

“간밤에 작별한 이름”은 다음날 아침 사람들의 손에 쥐어질 터. 종이 위에 뜨겁게 인쇄된 이름이 싸늘하게 식는 동안, 누군가는 밤새 뜨거운 울음을 쏟아냈을 것이다. “가벼워진 이름의 값”에 대해 더는 의문을 품지 않은 채. 먼발치에서 여명을 지켜보는 눈동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한여름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던 매미의 우렁한 울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잠든 당신의 새벽에, 조용히 다녀간 고인에게 “우비”를 입혀주고 싶다.

박희준 mylove5892@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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