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하는 기자] 늦깎이 고아에게 띄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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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고아가 됐어.
아빠의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마음이 좀 괜찮냐고 묻는 남편에게 난 고아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어쩌면 유언이었을, 한결같은 말 "우리 막내딸, 둥글게 살아라." 고아가 된 나는 종종 동그마니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곳에 턱을 괴고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빠, 하고 달콤한 숨을 옅게 토해본다.
일 년 전 나를 고아로 만든 아빠에게 늘 편지 한 통 띄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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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고아가 됐어. 아빠의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마음이 좀 괜찮냐고 묻는 남편에게 난 고아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나이 마흔에 고아는 무슨 고아냐며 돌아선 남편 뒤통수를 향해 시샘 섞인 속말을 삼켰다. 당신은 좋겠네 엄마가 남아있어서.
아빠의 일주기를 갓 지나 맞은 추석이었다. 시가를 가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시어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시고, 시가에 가면 으레 게으름을 떠는 딸마냥 몸은 편하게 지내고 오는 형편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맞다. 아빠의 죽음을 끝으로 허울뿐이었던, 그래도 입말로나마 남아 있던 친정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명절 방문처 한 곳이 줄었고, 용돈 지출이 반으로 깎였으며, 숙제하듯 걸던 안부 전화에서도 해방됐다. 후련과 허전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이내 도달하는 곳은 그리움이었다.
스스로 인정하건대, 나는 참 살가운 딸이었다. 친정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빠의 무릎을 베고 얼굴을 올려다보며 종알거리는 것이다. “아빠, 글쎄 최 서방이” “아빠, 있잖아 우리 회사에” “아빠, 근데 며칠 전 꿈에”… 아빠, 하고 뒤에 붙는 숨소리조차 달콤한 시간들. 잠자코 말을 듣다 내 이마에서 정수리까지의 짧은 길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아빠는 입을 연다. 어쩌면 유언이었을, 한결같은 말 “우리 막내딸, 둥글게 살아라.”
고아가 된 나는 종종 동그마니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곳에 턱을 괴고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빠…, 하고 달콤한 숨을 옅게 토해본다. 나만의 추모 의식이자, 뒤늦게 고아가 된 나를 도닥이는 행위랄까. 늦깎이 고아가 된다는 것은 이른 고아가 된 것 보다 수월할 듯싶지만, 아니다. 결이 다른 슬픔이고 무게가 다른 아픔이다.
일 년 전 나를 고아로 만든 아빠에게 늘 편지 한 통 띄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지금에서야 다른 이의 시를 빌려 나와 당신을 위로한다.
‘아버지, 당신의 틀니가/결국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이제 당신은 자유로워지셨군요/헐은 입천장과 잇몸을 짓누르던 재갈로부터/입 속에 절벅거리던 침으로부터/누대에 걸쳐 이어져 온 저작(咀嚼)의 노동으로부터/…/당신을 가만히 내려놓은 틀니/그 피 흘리지 않는 잇몸과 닳지 않는 이빨들은 말합니다//살아있는자, 씹고 씹고 또 씹어야 한다 씹어 삼켜야만 한다/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나희덕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중)
아빠가 꿈에 나왔으면 좋겠다. 닫힌 눈, 열린 입. 염이 끝나고 차가운 스테인리스에 올라 누운 가련한 모습일지라도. 그 꺼멓게 벌어진 입에 가만히 귀를 대고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둥글게 살아라…” 안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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