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사회는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낮에는 반미시위에 참여하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재즈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국민들은 ‘국가’를 자기 이에(家)나 무라(村)와 같은 공동체로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가주의’의 정점이었을 유신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도 국가주의라는 것과 대면했지만, 그건 어딘가 엉성한 것이었다.》
국가와 천황과 나를 동일시
오후 6시였던가, 국기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길을 걷다가도 모두들 멈춰서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장면은 엄숙하다기보다는 살짝 코믹한 것이었다. 애국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 노무 거, 언제까지 해야 하나’, 뭐 그런 쪽이었다. 나는 TV 속 태극기 앞의 근엄한 사람들보다, 어쩐지 이들이 더 미더웠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금 모으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때 ‘에이 씨∼’ 하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던 그분들이었을 것이다.
국가주의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이보다는 훨씬 진지했다. 코믹한 분위기도 삐딱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진지함이 지나치다 보니 국가와 천황과 나를 동일시하며, 무슨 사교집단처럼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까지 만들어 버렸다. 한국의 유신정권도, 타이완의 계엄정권도, 중국의 공산정권도, 심지어는 북한의 김씨 정권도 이르지 못한 경지다.(아마도 북한은 전쟁 전 일본 국가주의와 가장 비슷한 체제일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는 북한 체제를 전쟁 전 일본 천황제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시대 ‘백성’이 ‘국가’에 대해 갖는 감각은 그 종류도 강도도 오늘날의 ‘국민’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국민국가(nation state)는 ‘백성’에게 국가라는 존재를 주입시키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왔고, 그 결과 ‘국민(nation)’이 형성되었음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 방법은 국기, 국가, 국경일의 제정, 의무교육, 징병제 등 비슷했지만, 그 과정은 나라마다 다양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인 1870년대에는 취학률이 25∼50%에 머물렀지만, 1890년대에는 90%를 넘어섰고, 러일전쟁 무렵인 1905년에는 남아의 98%, 여아의 93%가 취학했다. 어떻게 이토록 단기간 내에 국가가 인민 속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번은 애국심의 사범학교”
이에 대해 메이지 시대 유명 저널리스트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은 “일본 국민은 애국심의 사범학교로서 번(藩)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야마지 아이잔 ‘日漢文明異同論’). 도쿠가와 시대는 최대 영주인 도쿠가와 막부와 약 270개 내외의 번(봉건국가)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번들은 대부분 한 가문(다이묘·大名)이 세습하면서 통치했고, 그 밑에는 가신단과 영민(領民)이 있었다. 가신단의 첫 번째 충성 대상은 막부가 아니라 자기 번과 다이묘였다. 그들은 자기 번을 ‘구니(國)’라고 불렀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로 갈수록 번 당국은 번조(藩祖·번을 세운 다이묘) 현창 사업이나 다이묘의 지역 순행을 빈번히 시행함으로써 영민들 사이에서 번의 존재감을 확산시켜 갔다. 이를 학계에서는 ‘번국가화(藩國家化)’ 현상이라고 한다. 번이라는 것이 규모가 큰 것이라도 우리 경기도만 한 면적에 인구 70만 정도였으니, ‘번국가’의 침투도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지방 백성보다 일본 어느 한 번의 백성이 ‘번국가’에 대해 느끼는 밀도(密度)는 더 높았을 것이다.
1853년 페리 출현 이후 도쿠가와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번을 뛰어넘어 ‘일본’ 전체의 방위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번국가’ 의식 역시 기로에 처하게 된다. 강대한 서양 세력과 맞서려면 번이 따로따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전국의 번을 강고하게 결합할 새로운 구심점이 절실해지자 천황을 추앙하는 존왕사상(尊王思想)이 확산되었다. ‘번국가(다이묘)’에서 일본(천황)으로 충성의 대상은 전환되기 시작했다.(박훈 외 ‘근대 일본인의 국가주의’)
번에서 국가로, 확장된 국가의식
그러나 그 전환은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천황이라 하더라도 수백 년을 섬겨온 주군(다이묘)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하기 힘든 배신 행위였다. 이 시기 ‘유신지사’들은 주군과 천황 사이에서 자기 분열을 겪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뇌에 찬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존왕양이 사상의 주창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나는 모리가(毛利家·조슈번의 다이묘)의 신하다. 따라서 주야로 모리가에 봉사하기 위해 연마한다”(吉田松陰全集 8권)고 했고, 천황이 미토번(水戶藩)에 내린 밀칙(무오밀칙·戊午密勅)을 둘러싸고 다이묘의 명령을 거부했던 다카하시 다이치로(高橋多一郞)는 스스로를 ‘죄신(罪臣)’이라고 자칭했다.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도 번 당국과 불화하자 “사정(私情)으로는 누대에 걸친 신하이니, 감정상 가만히 있기 어렵고 도외시할 수가 없다”(大久保利通文書 3권)며 고심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번을 폐지하여 천황직할체제를 만들어 버렸다(폐번치현·廢藩置縣·1871년). 다이묘를 앞장세워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지 3년 반 만이었다.
메이지천황은 다이묘들을 불러모아 폐번치현을 선언했다. 폐번치현을 주도하고 그 현장에 입회해 있던 조슈번 사무라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기뻐 날뛰는 대신 울었다. “(조슈번 다이묘께서는) 50, 60명의 다이묘들과 나란히 엎드려 듣고 계셨다. 해악(海嶽)도 미치지 못할 높은 은혜를 내게 주신 주군이시다. 감정이 가슴에 차올라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도 몰랐다.”(木戶孝允일기 2권)
고뇌와 번민이 있었지만 ‘작은 국가’(번)에서 이미 익숙해 있던 국가의식을 ‘큰 국가’(일본)에서 사이즈 업(size up)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구니(國)’에 강한 일체의식을 갖고 있던 사무라이 출신들은 새로운 국가에 대한 충성에 쉽게 적응해 갔다. 그리고 ‘백성’에게 국가의식을 주입하여 ‘국민’으로 만드는 데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 국가주의의 뿌리는 유별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군부도 없는 나라를 ‘군국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난센스겠지만, 일본의 리버럴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도 일본 이해로서는 애꾸눈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