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 돌아가길 주저하는 이유[폴 카버 한국 블로그]

폴 카버 영국 출신 번역가 2023. 10. 1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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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최근 들어 내가 갑자기 늙어 보이게 된 건지 혹은 한국에서 사는 게 불행해 보이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조만간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있는지, 은퇴는 언제 계획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 한국에 온 지 거의 20년이 되었고 내 인생 전체가 이곳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인으로 완전히 귀화할 마음은 없다. 한국 영주권이 있기는 한데도 여전히 영국 여권을 고집스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욕심스럽게도 두 나라의 장점을 모두 갖길 바라는 마음일 거다.
폴 카버 영국 출신 번역가
창피한 일이지만, 지난 몇 해 동안 브렉시트라는 격변의 시기를 겪는 사이 내 고향 나라가 다양한 경제 지표 측면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뒤처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옵션이 되어버렸다. 물론 한국에서의 삶이 완벽하다는 말도 아니다. 한국은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공깃밥 한 그릇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질적 사회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다.

두 나라의 “문제점”을 따지는 방식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 다른 이유를 찾아봤는데, 지금으로서는 자식들의 거취가 내 노후를 결정할 만한 가장 큰 요인인 듯싶다. 이번에 내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대학에 입학했는데, 두 자녀가 어디에 취업하는지에 따라 내 은퇴 장소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한국에 남는 것이 더 매력적인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로, 내가 한국에 오래 살아서 한국 생활이 많이 편해졌다고 느낀다. 한국화가 오래 진행된 결과로 나는 영국과 다른 한국적인 것들을 비교하는 버릇이 없어졌고,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한국은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외국인들이 적응하기에 훨씬 쉬운 사회로 변했고, 전반적으로 한국 생활은 빠르고 편리하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수리하는 일이 생기거나 병원 갈 때 같은 여러 상황에서, 영국 특유의 느린 속도와 살인적인 비용으로 분명히 속 터지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한국에 눌러 있고 싶게 만드는 요인이 영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요인보다 훨씬 많고 크다.

직업적인 면에서 봐도 그렇다. 나는 현재 번역사로 일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 일들이 한국 회사에서 받는 일이기는 하지만, 작업 공간에 딱히 구애받지 않는 성격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최신 인기 드라마 자막을 번역하면서 해변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며 일하는 디지털 유목민이 될 수도 있다. 확률적으로는 비가 많이 오는 영국의 한 칙칙한 원룸에서 기업 재무 보고서를 번역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말이다. 또한 외국에 다시 오래 거주하게 된다면 한국어 실력이 다소 손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모국어인 영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의 오랜 거주로 인해 영국 고어체나 속담 등의 표현을 상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든지, 영국의 최근 신조어에 대해서도 둔감한 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취미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취미는 자전거 타기와 축구 관람인데, 내가 응원하는 한국과 영국 팀 모두 바닥에서 전전하는 팀이라 둘 사이에 크게 차이도 없을뿐더러, 한국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것은 영국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며 관중의 매너도 훨씬 신사적이다. 사이클링도 한국의 자전거 도로 네트워크가 영국보다 훨씬 우수하고 한국의 날씨도 영국보다 자전거 타기에 더 좋다.

이것저것 다 따지고 남게 되는 마지막 요소는 가족이다. 최근 내가 번역한 드라마에 따르면 “가족이란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가 아니라, 전부이다” 라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설사 아이들과 더 가깝게 살기 위해 영국으로 가더라도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일 텐데, 한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요인일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명확한 답은 아직 없는 듯하다. 내 외국인 친구들도 경우가 다양하다. 어떤 친구들은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역문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1,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또 다른 친구들은 고국에 성공적으로 다시 정착해서 아직까지 잘 살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친구들은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들은 이도 저도 못 하고 한국에 갇혀서 억지로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살아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모쪼록 때가 되었을 때 나에게 맞는 결정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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