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발과 손, 그 쓰임에 관하여
추석 지나고 가을이 왔다. 어느새 발밑에 깔리는 바싹 마른 낙엽들. 어디선가 주춤주춤 나타나서 해자(垓子)처럼 둘레를 친다. 추석, 가을, 낙엽. 이 말속에 최근의 내 감각은 한 소쿠리씩 담긴다. 자연이 있고 이에 따라 언어가 발명되었겠지만, 이젠 저 말의 봉지를 따 그 진한 냄새를 흡입하고서야 이 계절 안에 제대로 풍덩 잠긴다. 알록달록한 단어들이 아니었다면 시월의 이 느낌, 이 기분과 어떻게 밀착하랴.
그런 생각의 와중에 마침 우리의 한글날은 있다. 반짝이는 하루를 지나면서 두툼한 국어사전을 부러 쓰다듬어 본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질서 있게 배열된 낱말마다 품사도 정확히 벼슬처럼 주어진다. 저 말들을 언제 다 대접해 주나. 죽기 전에 한 번씩 입에 넣고 중얼거려보나. 범박하게 말해 사전 속의 어휘들은 세 종류로 대별할 수 있겠다. 사물(물질)에 대응하는 것과 사건(현상)을 품는 것 그리고 꾸미는 것.
어쩌면 이 말들은 인체의 각 기관을 벼리로 삼아 분류할 수도 있겠다. 숲속의 나무들이 저마다의 자세로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생태계도 각기 고유한 영토를 거느린다. 고독과 기쁨이 사람의 생활에 필수요소이듯 ‘실수’와 ‘만족’도 각각 행동과 감정에 연결된 비타민 같은 낱말들. 누구나 일상을 영위할 때 가까운 동반자인 저 두 단어를 호출해 본다. 만족은 滿足이고 실수는 失手다. 왜 하필이면 발과 손일까.
옷으로 가둔 좁은 면적이지만, 몸은 본인에겐 어마어마한 대륙이다. 아마존도 흐르고 백두산도 있고 태평양도 출렁거린다. 일생 집중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못 가볼 엄청난 넓이다. 그래서 공자도 발부터 시작해서 귀에 이르고서야 평생의 이력서를 완성하였고, 제자들에게 종종 손을 동원한 찰진 비유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일단 저지르는 데 선수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몸을 대표하는 손.
영과후진(盈科後進)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다 채우고 난 후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세월의 강에서 사람의 몸 또한 사람 모양의 웅덩이다. 부도처럼 뚱뚱한 항아리. 시간의 모래밭에 꽂힌 저 빗살무늬토기 같은 몸뚱이가 바닥인 발부터 채워질 때라야 얻는 현상이 만족이라는 것.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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