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수동적 생존에서 능동의 삶으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사진)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당연하게도 제목이다. 역동적인 ‘액션’이 아니라 일반적인 움직임을 의미하는 단어를 택한 것은 이 작품의 비범함을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초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전형적인 슈퍼히어로물과는 거리가 있다. <무빙>의 ‘움직임’은 능력자들의 ‘배틀 액션’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생존형 분투로 그려지며, 더 나아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내는 삶 그 자체에 가깝다.
실제로 드라마 <무빙>의 주요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같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다.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비행 능력을 지녔지만 조직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김두식(조인성)이 대표적이다. 안기부 시절부터 최고의 블랙요원으로 불렸던 두식은 새보다 높이, 빠르게 날 수 있음에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 초인적인 오감을 지닌 이미현(한효주), 초재생능력을 가진 장주원(류승룡) 등 다른 동료 요원들도 마찬가지다. 조직은 그들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관리하며 감시한다.
이들의 남다른 능력과 비극적 운명은 자녀 세대로까지 이어진다. 두식과 미현의 능력을 모두 물려받은 아들 봉석(이정하)은 국정원의 감시를 피해 살아가느라 제대로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란다. 아버지 장주원의 초재생능력을 그대로 빼닮은 희수(고윤정) 역시 평범한 학생들처럼 살아남으려 능력을 감춘다. 둘과 같은 반 친구인 강훈(김도훈)은 괴력을 지닌 아버지 이재만(김성균)의 전과 말소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일찌감치 국정원에 저당 잡힌다.
<무빙>의 탁월한 점은 이처럼 지배적 질서의 통제를 받는 이들의 고민을 통해, 그저 재미있는 오락물에 그쳤을 영웅물을 제한적 삶에 갇힌 이들의 실존적 이야기로 확장시켰다는 데 있다. 작품이 비판하는 억압적 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쓸모’를 강요하는 현실이다. 이는 초능력자이자 지적장애인인 이재만의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놀라운 스피드와 괴력을 보유한 능력자 이재만은 국정원 블랙팀 후보 대상에 오르지만, 장애가 밝혀지자 가차 없이 ‘쓸모없는 자’로 분류된다. 드라마는 이재만이 능력을 검증당하는 과정에서 청계천 상가 철거의 역사를 소환해 ‘효율성과 개발 시대’의 폭력을 환기한다.
드라마에서 제한적 운명에 갇힌 이들을 역동적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역설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된, 소위 “싸구려 휴머니즘”과 같은 가치들이다. 주인공들은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이들을,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초능력을 사용한다. 예컨대 ‘각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17회에서 봉석은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능력에 눈을 뜬다. “내가 드디어 뜨는 게 아니라 날았어”라는 봉석의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끊임없이 유용함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붙들려 있던 이들은 소중한 가치를 깨달으면서 비로소 부유하는 존재에서 비상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리하여 <무빙>은 수동적인 생존에서 능동적인 현존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에 휴머니즘의 가치가 놓여 있다.
드라마는 일찌감치 3회에서 미현의 입을 통해 그 주제문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친구들에게 초능력을 과시하려는 어린 봉석에게 미현은 말한다. “초능력? 그게 뭔데. 중요한 건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는 게 무슨 영웅이야. 그건 아무것도 아냐.”
<무빙>의 이 같은 주제는 어쩌면 몇년 전만 하더라도 올드한 이야기, 신파로 치부당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논리로 위력을 떨치는 이 시대에 새삼 위로로 다가오며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됐다. 돌이켜 보면 강풀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이 등장했을 당시도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었다.
<무빙>의 휴머니즘은 결말에서 상처투성이 용득(박광재)을 위로하는 희수의 모습을 통해 다시 빛을 발한다. 남한 초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체제의 희생양이었던 용득이 갈 곳을 잃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희수는 지나치지 않고 그의 상처를 다독여준다. 그의 모습에서 초능력은 그저 물리적 힘일 뿐이며, 공감과 휴머니즘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동력임을, <무빙>은 확인시켜준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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