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결말 알아도 눈물 흘릴 수 있도록" 무대서 더 빛나는 디바의 통찰력
유럽서 생각하는 소극적 동양여인 모습 깨고파
노래로 감동줬는지 따라 작품 성공 판단
청중에 전달하기 좋은 밝은소리 추구
캐릭터 이해위해 '인내' 필요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소프라노 임세경
임세경의 10월은 오페라로 가득하다. 성남아트센터의 '나비부인'(10.12~15)에서 초초 상 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나면, 제2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일환인 국립오페라단 '맥베스'(10.27·28)에 레이디 맥베스로 출연한다. 한 달 새에 떠나간 남편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선한 여인'이었다가, 욕망에 눈이 멀어 남편을 살인자로 만들고 저 자신도 망가진 '악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양극단의 두 역할에 관해 묻자, 그는 "선한 면, 악한 면 모두 인간 임세경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내 속의 강한 모습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 성장한 초초 상에게서 나오기도 하고, 무너져 가는 하나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레이디 맥베스를 표현하기 위해 여린 감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라고 답했다.
"선한 것이 악한 것, 악한 것이 선한 것(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선문답 같은 이 문장은 희곡 '맥베스'의 세 마녀가 등장하며 읊조리는 대사다. 임세경이 말하는 두 여인 또한 대문호의 문장과 일맥상통하며 선과 악으로 쉽게 정의되지 않아,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것 같다. 주요 오페라 극장의 주역으로 활동해 온 '현장 가수' 임세경의 오페라 역할 접근법부터 성악 테크닉까지, 그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던 두 시간여의 대화를 옮겨본다.
-오페라에 한국적 색채를 입혀 연출했던 정구호가 연출과 무대 전반을 맡은 '나비부인'에 합류하게 됐다. 지금까지 초초 상 역으로만 150번 이상 무대에 올랐다고 들었다.
"150번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세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안 세고 있다. 200번이 다 돼가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할 때마다 고민한다. 특히나 유럽에서 흔히 생각하는 소극적인 동양 여인의 모습과 상징은 깨고 싶다. 연출가가 색다른 배경의 오페라를 연출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연출가의 요구에 따라 변하겠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임세경의 초초 상'이라는 특징이 있을까.
"새로운 연출을 만날 때마다 1막이 차이가 크게 난다. 전통적인 기모노를 입기도 해봤고, 헬로키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연출 속에서도 작품이 가진 정체성이 분명해 바뀌지 않는 에너지가 분명히 있다. 2막 중간부터 3막까지 이어지는 초초 상의 캐릭터를 끌어가는 힘이 나의 장점이다."
-'나비부인'은 작곡 당시 만연했던 동양에 대한 환상을 반영한 작품이다. 동시대 동양인 시선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는 작품인데, 다양한 현대적 접근의 프로덕션을 경험했을 것 같다. 초초 상이라는 역할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접근이란 무엇일까.
"빈 슈타츠오퍼에 가니까 오케스트라가 '나비부인'은 아예 연습도 안 하더라.(웃음) 그 정도로 잘 알려지고, 많이 연주한 작품이라는 자신감인 것 같았다. 공연을 보는 관객도 '나비부인'의 결말을 모르고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은, 내 기준에서는 노래로 관객을 얼마나 '울릴 수 있는지'가 성공의 기준이다. 아무리 오래되었을지라도 눈물을 흐르게 하는 명작영화처럼 '나비부인'의 설득력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를 했는지에서 나온다. 노래를 하면서 이 지점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리고 '나비부인'에는 그런 지점이 의외로 많다. 버림받아 슬픈 여인의 모습 외에, 스즈키와 초초 상 두 여인의 우정이나 샤플레스 영사의 친절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는 걸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 촘촘한 심리 서사로 완성하는 오페라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 오르는 국립오페라단 '맥베스'는 지난 4월, 서울 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드라마틱한 오페라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가 인물의 섬세한 심리 변화에 집중하도록 도왔다. 어리석고 무능한 맥베스를 왕이 되도록,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던 레이디 맥베스는 그 자신도 결국 정신을 놓고 죽는다. 그 심리가 변하는 과정에 대해 연출가와 대화를 많이 했다. 레이디 맥베스 역을 처음 맡아 본 데뷔 무대였는데, 강인한 여성으로만 접근하는 것보다는 많은 것이 해결돼 연출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원작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본성과 탐욕, 이에 따른 파멸을 고발하는 듯해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면 깊숙한 것을 건드린다. 레이디 맥베스가 부르는 가사 중에 공감가는 대목이 있다면 무엇인가?
"4막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자기 몸에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환상에 시달린다. 그때 부르는 아리아에 '우나 마끼아(Una macchia)'라는 가사가 있다. '자국'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가 나오는 프레이징을 늘 1막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시작한다. 아무리 흉내를 내도, 인간의 내면에는 마치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도장처럼 인이 박인 나만의 '자국'이 있지 않나. 처음부터 이 결말을 생각하고 시작하면, 1막부터 지나치게 강한 여성으로만 레이디 맥베스를 그려낼 수 없고, 좀 더 복합적인 역할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바리톤 양준모가 맥베스 역을 맡아 함께 호흡을 맞췄다. 11월 국립오페라단 '나부코'에서도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음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맥베스'는 무거운 스토리를 지닌 베르디의 오페라지만, 둘 다 어두운 음색이라기보다는 '밝은 소리'다. 개인적으로 밝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테크닉적으로 높게 산다. 전달력이 좋기 때문에 밝은 소리가 좋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음색으로 비극적 표현을 찾지 않고, 밝은 소리를 유지하며 캐릭터의 심리를 표현해 오페라에 걸맞은 분위기를 찾는다. 서로 발성이나 캐릭터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는데, 의견이 같았다. 내가 만난 성악가들 중 이 부분에 가장 잘 집중하고 있는 성악가이다."
◇ 정확한 노래는 멀리까지 들린다
-앞서 말한 '밝은 소리'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소리랄까. 이탈리아어로는 '스꾸일로(Squillo)'라고 한다. 이 단어는 전화가 울리는 '띠링띠링' 소리나, 벽을 뚫는 드릴의 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볍고, 좁아서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멀리 가는 소리다. 벨 칸토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벨 칸토란 이 '스꾸일로' 스타일에 있다. 예전부터 벨 칸토는 늘 이 '스꾸일로'를 추구해왔다. 음색이 어둡거나, 넓어지면 벨 칸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벨 칸토의 아름다움을 3층 객석까지 전달하려면 이 반짝이는 소리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 벨 칸토적 발성이 요즘 많이 무너진 것도, 현장보다 스튜디오 녹음이나 마이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도 이 부분을 정말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다."
-2020년부터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학생을 만나고 있다. 교육자로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해서 많이 강조한다. 단어 뜻만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캐릭터가 될 만큼 이해하려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겸손도 중요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하고도 2년 만에 사라지는 수많은 가수를 봐왔다. 무엇보다 무대에서는 자신감이 제일 중요하다. 인내, 겸손, 자신감. 이 세 가지는 나도 늘 마음속에 가지고 사는 단어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오페라가 있다면 무엇인가. 또한 그 오페라들에 오르는 임세경을 모두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에 더 많은 오페라 프로덕션을 선보이기 위해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는 부분이 있나.
"오페라를 위한 훌륭한 지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김은선 지휘자(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와도 '나비부인' 공연을 위해 만난 적 있는데, 정말 인상 깊은 지휘자였다. 그런 지휘자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연출가도 정말 중요하다. 초초 상을 200번에 가깝게 맡고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는데, 무대 경험이 별로 없는 젊은 성악가들은 얼마나 어렵겠나. 이럴 때 연출가의 존재는 성악가들의 발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고, 좋은 소리를 가진 한국의 많은 성악가들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다. 못 해본 오페라는 아직 정말 많다! 그래도 유럽에서 '나비부인'으로만 무대에 오르는 동양 소프라노도 많은데, 그에 비해서는 여러 역할을 해본 편이긴 하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오페라 중에서는 '라 조콘다' '안드리에 셰니에' '돈 카를로' 등을 해보고 싶다."
글=월간객석 허서현 기자·사진=성남아트센터·대구국제오페라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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