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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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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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살이]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상한 일이지만, 예전에도 한글로 ‘부의’라고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 봉투에 ‘슬픔을 함께합니다’라는 식의 어쭙잖은 문구를 적는다. 글자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일이겠거니 하면서(물론 별 소용 없는 일이다. 봉투의 쓸모는 ‘누가’와 ‘얼마’를 표시하는 데 있으니).
글 쓰다 죽은 어느 망자 빈소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 사이로 이런 문구의 조기를 본다. “우리 슬픔이 모였습니다. 보라, 우리는 우리의 도타운 글이 있나니.”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올려놓은 힘없는 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늘 언어 뒤를 따른다. 앞이나 옆이 아니라, 항상 뒤에 있다. 언어가 가자는 길로만 따라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새로운 말을 시도하자마자 그 또한 상투화의 길로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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