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부산행…모두가 말린 작품 성공시킨 '청개구리'
30대때 메가박스·쇼박스 대표이사 거치고
모험·혁신 갈증 느껴 2008년 'NEW' 설립
"韓서 히어로물 성공 못한다"는 편견에도
'사람 사는 이야기' 담은 무빙 흥행시켜
긴 호흡으로 K콘텐츠의 세계화 이끌 것
짙은 구름과 어둠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 미지의 하늘로 곧 출발을 앞둔 매끈한 알루미늄 항공기의 반짝이는 뒷모습. 호주 출신 사진작가 피터 릭이 미국 오리건주 비행기 격납고에서 찍은 프로펠러 항공기 ‘더글러스 DC-3’의 모습이다.
사진 속 비행기는 1940년 전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제작됐다. 수천 장의 알루미늄 조각을 손으로 하나하나 이어 붙여 만든, 모험과 혁신의 유산이다. 전쟁 때 수많은 포화를 뚫고 쌩쌩하게 날아다녀 ‘하늘을 나는 기차’로 불리던 녀석이다.
최근 서울 논현동 NEW 사옥에 있는 김우택 회장 집무실에 들어서니, 가로 1.5m로 인화된 이 작품 ‘퍼스트 플라이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김 회장은 ‘태극기 휘날리며’ ‘부산행’ 등 수많은 천만영화를 제작한 미다스의 손이다. 그는 호주 여행 중에 우연히 마주한 이 사진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첫 비행을 앞둔 조종사의 마음이 영화 제작자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간을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요즘 ‘슬램덩크’와 ‘닥터차정숙’ ‘무빙’ ‘밀수’ 등 성공작을 줄줄이 내놓고도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2시간 넘게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가 수없이 반복한 단어는 “긴 호흡”이었다.
NEW는 영화업계에서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와 함께 ‘빅4 배급사’로 통한다. 30대에 메가박스와 쇼박스 대표이사를 지낸 김 회장이 2008년 설립했다. CJ 롯데 오리온 등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된 콘텐츠 투자배급 업계에 혈혈단신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도 ‘넥스트(N) 엔터테인먼트(E) 월드(W)’란 ‘시건방진’ 사명을 달고.
김 회장은 ‘잘나가던’ 봉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고 창업한 이유를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부산행’도, ‘무빙’도 모험이었다.
올해 콘텐츠업계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코로나 팬데믹은 끝났지만, 어쩌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 쉽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극장엔 개봉을 미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관객은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으로 갈아탄 지 오래다.
그래서 NEW의 성과는 단연 돋보인다. 올 초 배급한 ‘더퍼스트슬램덩크’는 470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극장 한파 속에 벌어진 여름철 대작 경쟁에서 제작 투자한 영화 ‘밀수’는 500만 관객을 넘어섰고, 창업 이후 처음으로OTT 전용 시리즈물로 기획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무빙’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6관왕을 휩쓸었다.
수입 영화, 자체 제작 영화, 그리고 시리즈 드라마까지 연이은 홈런을 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작은 회사여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 비해) 더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아침에 본 시나리오를 오후에 투자 결정할 때도 있어요. 영화다, 드라마다, OTT다, 이런 구분은 ‘큰 흐름’ 속에선 의미가 없습니다. 숨 가쁘게 변화하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공급자가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숫자 다루는 일을 하다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투자한 영화 실적에 일희일비하는 순간도 수두룩했다. 그 과정에서 배운 생존전략은 ‘변화의 큰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자본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작은 변화에도 빠르게 움직이죠. 드라마로 자본이 옮겨갈 때 ‘태양의 후예’를 제작했습니다. 영화 제작자에게 드라마는 생소한 영역이었지만, 크게 보면 킬러 콘텐츠를 만드는 게 목표란 건 똑같거든요.” 남들 안 하는 걸, 빠르게 실행한다는 김 회장은 작품을 결정할 때 직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 광고, 음악, 영화 등 장르별로 담당하는 팀을 분리해 서로의 영역은 존중하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편이다.
“창업 초기에 함께한 감독과 작가들이 우리 제작팀, 경영팀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많습니다. 매력적인 소재,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창작자와 감독을 발굴하고 깊게 들여다보는 게 조직문화가 됐다고 할까요. 작은 시도를 함께한 이들이 지금은 하나의 팀이 된 거죠.”
오직 ‘잘된 결과물’로 평가하는 세상이지만 그에겐 크고 작은 제작 투자가 하나같이 도전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겠다는 초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전용 콘텐츠였던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극장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부산행’도 “한국에선 좀비 영화는 안 된다”는 우려 속에 출발했다. “신파 드라마는 극장에서 안 통한다”고 말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 ‘7번방의 선물’도 있었다. ‘무빙’은 또 어떤가.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간 진화해온 히어로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국형 히어로물이 웬 말이냐”는 게 주변 사람들의 첫 반응이었다.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김 회장이 30년 넘게 콘텐츠산업에 종사하며 얻은 동물적 감각이 궁금했다. “결국은 사람 이야기죠.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군상의 단면과 사랑이라는 감정,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관통한다면 그게 좀비 영화든, 히어로물이든 보여지는 ‘장르’는 그저 장르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강풀 원작의 ‘무빙’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죠. 한국형 히어로물 속에 숨겨진 ‘보편적인 사람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장 마주한 숫자가 녹록지만은 않다. NEW는 올 상반기 65억원 적자를 봤다. 지난해 매출이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산적했다. “가능하면 길게 보려고 해요. NEW의 DNA를 긴 호흡으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문화산업 특성상 감독과 작가, 직원들과의 관계가 결국 자산이 되는데, 여기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최근 회사 안팎의 상황에 대해서는 “숨을 고를 때”라고 했다. 잘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 배급에 집중하고, 도약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글로벌 플랫폼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2019년 출범한 NEW ID를 ‘미래 먹거리’로 거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장기적으로는 NEW가 산업 트렌드를 이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장의 실적뿐만 아니라 한국 콘텐츠의 세계화에 보탬이 되는 게 저의 남은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김보라/안시욱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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