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뉴노멀 '일하는 노인'
'노인가장' 비관 보도 쏟아져
소득·자아실현에 만족감 크고
자녀의 부모부양 부담도 줄어
초고령사회 속 인식전환 필요
칠순을 오래전 넘긴 기자의 장모는 4~5년 전부터 노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노인 대상 모바일 교육 프로그램 강사로 일한다. 어린 시절 꿈이 교사였으나 대다수 전란 세대처럼 장모 역시 고등학교 교육을 끝내지 못했다. 짧은 배움이 아쉬웠던 장모는 장인이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 스마트폰을 배우러 교육 프로그램에 학생으로 참여하다 강사까지 됐다. 이제는 간단한 강의 영상도 앱으로 만든다.
작은 벌이가 생기다 보니 별로 챙겨드리는 것도 없는 사위 생일날엔 기프티콘도 '짠' 하고 날려주실 여유가 생겼다.
지난해 10월 한국은행은 '고령층 고용률 상승 요인 분석'이란 보고서를 내면서 60세 이상 고령자 취업이 증가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자녀가 부모에게 주는 용돈 등 사적 이전의 감소를 꼽았다. 자녀로부터 지원이 줄면서 취업전선으로 나서고 있다는 분석인데 나는 거꾸로 해석하는 쪽이다. 예전에 없던 다양한 일자리 기회가 생겨나면서 상당수 노인에게 소득원이 발생하며 자녀로부터 용돈을 받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일하는 노인이 늘수록 자녀세대 부담이 줄어드는 건 자연스러운 뉴노멀 현상이다.
이달 초 노인의 날(10월 2일)을 전후해 나온 통계청 통계를 근거로 우리 언론이 쏟아낸 기사들은 '노인 불행 보고서' 같았다. 가구주가 65세 이상인 노인가구 비중이 올해 처음 25%를 넘어서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65세 이상 고용률은 가장 높다는 내용의 통계다. 언론들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노인 가장(家長)에 대한 비애를 쏟아냈다.
일하는 노인이 많은 대한민국은 과연 '헬조선'인가. 같은 통계의 다른 숫자를 보자. 일하는 고령자의 37.5%가 건강 상태가 좋다고 답했다. 비취업 고령자(21.9%)보다 15.6%포인트 높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비중도 34.4%로 비취업 고령자보다 2.0%포인트 낮았다. 일하는 노인이 더 행복하다는 거다. 다수가 농경사회에서 살던 우리 부모 세대에겐 노년의 부모가 더 이상 논밭에 나가 고생하지 않도록 자식이 같이 살며 모시는 게 효도였다. 지금은 어떤가. 해당 통계의 또 다른 문항에선 '자식과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일하는 고령자' 사이에서 81.9%에 달하고 비취업 고령자에서조차 72.9%에 달했다. 은퇴 후엔 더 이상 자식에게 구속받지 않고 남은 인생은 자유롭게 살려는 게 요즘 노인들 트렌드다. 얼마간의 적정 소득과 새로운 자아 실현을 보장해줄 일자리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문재인 정부 때 만든 100만개 노인 일자리가 욕을 먹은 건 애초부터 얼토당토않던 소득주도성장 역풍에 '뚝' 떨어진 고용률을 땜질하려는 임시방편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휴지 줍기, 산불 감시, 등굣길 도우미 등 현금 살포성 일자리가 쏟아지자 노인구직센터 등 민간에서 운영하던 일자리는 되레 위축됐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일찍 겪은 일본은 노인 전용 슈퍼(직원도 100% 노인)와 같이 노인들이 주체적으로 일자리 자립 기반을 만들어내는 지속가능한 민간 주도형을 적극 지원한다.
장모가 일하는 곳엔 요즘 장모의 자리가 비길 기다리는 교사, 교수 출신의 고학력 대기자가 줄서 있다고 한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괜찮은 노인 일자리에도 경쟁이 커질 전망이다. 노인 인구 1000만 시대에 우리 사회에도 빈곤층뿐 아니라 중산층·고학력 은퇴자까지 아우르는 일자리가 늘어가길 기대한다. 저출산과 생산력 급감 가운데 숨어 있던 노동력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경제구조 개편이고 노동개혁이다.
[이지용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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