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보다 아식스가 편해” 유럽에 스며드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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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일본의 우동 체인 마루가메제면이 런던 동부 스피탈필즈에 ‘유럽 1호점’을 냈다. 개업 첫주부터 오전 11시면 가게 앞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다. 이렇게 시작한 마루가메제면은 2년 만에 영국 내 매장을 11개로 늘렸다. 팬데믹 당시 영국이 살인적 물가 상승을 겪을 때 5파운드(약 8200원) 미만의 우동값으로 인기를 끌었다.
마루가메제면은 공격적으로 유럽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맛’을 고집하지 않고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과감히 변신했다. 이를테면 런던 매장에서는 일본 매장에는 없는 ‘비건 우동’을 현지용 메뉴로 선보였다. 마루가메제면은 2027년까지 유럽 전역에 150개 매장을 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는 개척해야 할 신(新)시장이라고 하면 으레 동남아를 비롯해 개발도상국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요즘 성숙한 시장인 유럽에 진출해 성과를 거두는 일본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건비가 높고 경쟁 업체가 많은 데다, 경제 성장 속도가 완만한 유럽에서 일본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외무성에 따르면, 유럽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2019년 7959개였지만 2022년에는 8356개로 조사됐다. 3년 사이 397사가 새로 유럽 시장에 진입했다는 얘기다. 3년간 증가율이 5%지만 일본과 유럽이 모두 성장 속도가 낮다는 걸 감안하면 의미 있는 변화다.
◇3년간 유럽 진출한 日기업 397곳 증가
유럽에서 승부수를 띄워 성공한 대표적인 일본 기업은 스포츠 브랜드 아식스다. 유럽에서의 판매 호조를 바탕으로 올해 영업이익이 작년 대비 35% 증가한 460억엔(약 4170억원)으로 사상 최고 실적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아식스는 2020년만 해도 40억엔 영업 적자를 냈다. 그러나 그해 런던 마라톤에서 미국의 사라 홀 선수가 아식스의 신형 러닝화를 신고 뛰어 여자 2위를 기록하면서 유럽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유럽 소비자들은 “폭이 좁은 나이키에 비해 아식스 신발은 폭이 넓어 편하다”고 호평한다. 아식스는 2021년 영업이익 220억엔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2022년에도 영업이익 340억엔을 냈다. 작년 대륙별 영업이익에서 유럽 비율이 33%로 가장 컸다. 자국인 일본(18%)에서보다 유럽에서 돈을 더 많이 벌었다.
아식스뿐만이 아니다. ‘건설기계의 벤츠’라고 불리는 소형 건설기계 업체 다케우치제작소는 해외 매출 가운데 유럽 비율이 40%가 넘는다. 소형 건설기계로는 유럽 시장 점유율 2위다. 대개 굴삭기가 수십 톤급이지만 다케우치제작소는 2톤급 미니 굴삭기라는 틈새시장을 노렸다. 경관을 많이 훼손하지 않고 섬세한 작업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유럽 시장과 맞아떨어졌다. 유럽에서 주문이 쏟아지지만 생산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히트 펌프식’ 난방·급탕 기기로 유럽에서 판매 호조를 누리고 있는 다이킨공업, 유럽 화장품 브랜드에 화장용 브러시를 납품하는 하쿠호도, 일찌감치 유럽을 공략해 세계 최대 자전거 부품 업체가 된 시마노 등이 유럽 시장을 성장 발판으로 삼는 기업들이다.
◇5억 인구, GDP 20조달러 시장에 눈독
일본 기업들이 유럽을 공략하는 건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성숙한 시장이라 경쟁이 치열한 데다,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선점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을 돌파구로 찾는 이유는 유럽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시장으로서 매력이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주간 닛케이 비즈니스가 분석했다.
유럽연합(EU) 27 회원국과 영국을 합친 유럽은 인구 5억명 이상, GDP 20조달러(약 2경7000조원)의 거대한 시장이다. 일본보다 4배 이상 크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서 일본과 공통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며 “인력 수준이 높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ICT 산업에서 미국보다 뒤처져 경각심을 갖고 있는 유럽 각국이 혁신을 강조하고 규제를 대거 걷어낸 것도 매력적인 요소다.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가 유럽에 진출한 일본 기업 1454곳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혁신의 거점으로 북미보다 유럽이 더 매력적이다’라는 응답이 북미가 유럽보다 매력적이라는 응답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유럽 스타트업들이 북미처럼 투자 유치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창업 생태계를 만들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도 일본의 ‘큰손’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요즘에는 영국이 브렉시트(EU 탈퇴) 이후의 대외 전략상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것을 계기로 영국으로 눈을 돌리는 일본 기업도 많다. 종합상사 마루베니와 스미토모, 일본 최대 부동산 기업 미쓰비시지소 등 일본 대기업들은 지난 5월 대체 에너지를 중심으로 영국에 총 180억파운드(약 29조65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EU로 가는 일본 투자금 한 해 20조원
2021년 한 해 EU로 간 일본의 외국인 직접투자(FDI) 자금은 150억달러(약 20조3000억원)에 달한다. 요즘은 특히 유럽의 혁신형 ICT 기업에 투자하는 사례가 많다. 독일은 일본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유럽 국가인데, 예전에 주로 투자하던 자동차 산업보다 최근에는 독일 내 스타트업으로 일본의 투자금이 몰려가는 추세가 나타난다. 덴쓰그룹의 벤처캐피털 덴쓰벤처스는 독일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솔스텐에 3900만달러를, 미쓰이 물산은 독일의 충전 인프라 스타트업 모빌리티하우스에 5100만달러를 투자했다.
아예 유럽 기업을 사들이는 사례도 있다. 일본 제약회사 교와기린의 경우 지난 5일 영국의 유전자 치료 스타트업인 오차드 테라퓨릭스를 최대 707억엔(약 6415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북유럽까지도 투자를 확대하는 흐름도 있다. 일본 벤처캐피털 노르딕닌자는 2019년 이후 1억유로 이상을 들여 북유럽 혁신 기술 업체를 발굴하고 적극 투자해왔다. 에스토니아에서 시작해 유럽·아프리카에서 우버의 경쟁 업체가 된 모빌리티 스타트업 볼트, 스웨덴 운송 스타트업 아인라이드에 노르딕닌자의 자금이 투입됐다.
일본 벤처캐피털 프레시디오 벤처스의 구니히토 가와세 운영이사는 JETRO의 보고서에서 “일본 제조 산업이 여전히 거대하기 때문에 유럽 기술 업체가 훌륭한 잠재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며 “유럽은 일본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무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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