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하마스 끌어와 ‘9·19 군사합의 정지’ 속도전···“이스라엘처럼 전쟁할 건가” 비판
정부·여당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계기로 남북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9·19 군사합의로 대북 감시·정찰자산 활동이 제약받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9·19 군사합의를 더욱 준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김승겸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12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합참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앞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하마스 침공 양상과 유사할 거란 부분에서 시사점이 많다. 대표적인 게 기습적 공격과 감시·정찰 부분의 부족함”이라며 “(9·19) 군사합의로 인한 (군사분계선 상공) 비행금지구역 설정 때문에 감시범위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약받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10~11일 “이스라엘이 항공 비행(감시·정찰 자산), 무인기를 띄워 계속 감시했다면 그렇게 안 당했으리라 본다”며 “9·19 군사합의로 인해 대북 우위의 감시·정찰 능력이 크게 제한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빨리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도 전날 통일부 국감에서 “하마스가 5000발의 로켓을 쐈고 북한은 휴전선 바로 이북에 있는 장사정포를 1시간에 1만6000발 정도 쏠 수 있다”며 “9·19 군사합의서대로 하면 북한의 장사정포, 군사적 도발을 사전에 포착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여당에서도 힘을 싣고 있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전날 통일부 국감에서 “안이하게 상대방의 선의에 기초했다는 게 이스라엘 전쟁의 교훈”이라며 “우리가 북한의 적대행위를 사전에 알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보니 9·19 군사합의에 매여있다”며 효력 정지를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7일(현지시간) 시작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구실로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추진을 위한 여론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여권은 하마스 사태의 교훈이라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9·19 군사합의서 내용을 문제 삼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안보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국가안보상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윤 대통령이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 도발 직후인 지난 1월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며 ‘조건부 효력 정지’를 시사한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2018년 9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결과물인 9·19 군사합의는 남북이 지상·해상·공중 등 모든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9·19 군사합의가 대북 정찰·감시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며 여권 주장에 대한 반박도 이어지고 있다. 9·19 군사합의 협상 책임자였던 김도균 전 남북군사회담 수석대표(예비역 중장)는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저고도에서의 정찰·감시가 조금 제한된 부분은 있지만 정찰기 등 수많은 중고도·고고도 정찰 수단이 감시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며 “군사합의 체결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은 군사합의로 인한 작전적 대비태세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지휘관들에게 작전 지침으로 내린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하마스 침공 사태의 교훈은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가 아니라 반대로 군사합의 준수 강화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통화에서 “우리는 9·19 군사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하마스 같은 공격 행태가 안 일어난 것”이라며 “하마스처럼 분쟁이 전쟁으로 언제든지 비화할 수 있는 정전체제에서 9·19 군사합의 이행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9·19 군사합의의 군비 통제 효과를 강조해왔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국지 도발 횟수가 이명박 정부 때 228회, 박근혜 정부 동안 108회였는데 문재인 정부 때는 5회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김 전 수석대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70년 동안 문재인 정부 때처럼 전방 지역이 안정적으로 관리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이 그간 9·19 군사합의를 위반해왔지만 남한이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효력 정지할 경우 북한에 도발 빌미만 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북한이 9·19 군사합의를 조금이라도 의식하지 않게 되면 북한 도발을 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대표는 “9·19 군사합의가 파기되면 북측은 마음 놓고 전선 지역으로 나와 수백문의 해안포로 NLL(북방한계선) 일대에서 사격훈련을 재개하는 등 무력시위를 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남북의 군사적 충돌을 전제하는 듯한 정부의 호전적 태도가 국민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깊숙이 관여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제일 중요한 건 북한이 미사일 또는 장사정포를 못 쏘게 하는 것이지 힘을 겨루며 싸울 일이 아니다”라며 “윤석열 정부가 북한에 승리하고 응징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처럼 전쟁하는 게 맞나. 대한민국 국민이 죽고 끌려가고 다치는 게 맞나”라고 말했다.
정부의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본격화 움직임은 6개월 남은 총선을 의식한 국내 정치용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이념을 강조하는 흐름 속에서 대북 강경론을 앞세워 ‘집토끼’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라는 평가다. 익명을 요구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무조건 전 정부를 부정하며 극우적 지지층을 유지하려는 비상식적인 움직임”이라고 비판했다.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려는 신호탄으로도 평가된다. 9·19 군사합의 효력을 정지하면 남북관계발전법상 금지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처벌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있는 근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대북 전단 살포는 지난달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법적 족쇄가 풀린 상태다. 신원식 장관은 지난달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북 심리전을 재개해 북한을 억지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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