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학생들이 금요일에 파신을 입는 까닭은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 중후반, 란나제국의 오랜 수도이던 치앙마이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복잡했다. 1853년 대영제국과 버마(현 미얀마)의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이라와디강 삼각주 지역과 바고, 그리고 양곤 지역이 영국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버마와 국경을 맞댄 란나제국은 이미 영국령 버마와 자국 사이의 국경을 살윈(버마어로 ‘딴륀’)강으로 정했지만, 영국 상인들은 티크 목재 주산지인 치앙마이를 호시탐탐 노렸다. 란나와 이웃한 국가인 시암(현 타이)의 왕 쭐랄롱꼰(1868~1910 재위)은 치앙마이에서 확대되던 영국의 영향력을 주시했다. 결국 1874년 쭐랄롱꼰은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에서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치앙마이를 시암으로 병합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치앙마이 공주에서 “라오 여자”로
치앙마이를 둘러싼 영국과 시암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과열되는 가운데 갑자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치앙마이 왕 인타위차야논(1870~1897 재위)의 딸 다라랏사미 공주를 양녀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쭐랄롱꼰왕은 이제 갓 11살이 된 다라랏사미 공주에게 청혼한다. 1886년 다라랏사미는 방콕의 짜끄리 왕실로 옮겼고, 후궁이 됐다.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게다가 총 153명의 부인과 후궁을 둔 타국 왕의 후궁이 됐다는 것만 보면 다라랏사미의 삶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기구한 왕실 여인네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소 식상한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다라랏사미는 쭐랄롱꼰왕의 총애를 받아 짜끄리 왕조에서 최초로 ‘왕비’(Princess Consort)로 승격된 후궁이 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은 쭐랄롱꼰왕 서거 이후 치앙마이로 돌아간 다라랏사미가 란나제국의 전통·정체성의 상징이 됐다는 것이다.
‘별의 후광’이란 이름을 가진 다라랏사미 공주는 제국 간 영토 확장 대결이 가시화되던 1873년 치앙마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란나 왕실의 전통적인 관습과 의식을 란나어로 교육받았다. 당시의 복잡한 정세를 반영하듯 타이어와 북부 지역 언어인 ‘캄무앙’을 배웠고, 심지어 영어도 배웠다.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란나제국의 전통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한편, 어릴 때부터 승마를 즐길 정도로 활발한 성격이었다. 그런 딸을 지극히도 아꼈던 인타위차야논왕은 딸이 쭐랄롱꼰왕의 후궁이 되어 방콕 왕궁으로 옮길 때 동행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후궁 사이에서 다라랏사미는 ‘라오 공주’ 혹은 ‘라오 여자’로 불렸다. 방콕 사람들은 란나제국 출신자를 라오스인으로 인식했다. 말이 라오 공주지 방콕인에게 라오인은 시암인과 다른 훨씬 낮은 존재였다. 다라랏사미가 지나가면 생선이나 젓갈 냄새가 난다는 등 놀림당하면서도 다라랏사미는 의연하고 꿋꿋하게 란나 생활방식을 지켜나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라랏사미의 긴 생머리와 ‘파신’이라 부르는 치앙마이식 전통치마였다. 당시 방콕 여자는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긴 천을 몸에 두른 뒤 다리 사이로 빼낸 천 끝을 허리로 올려 바지처럼 입었는데, 다라랏사미는 방콕 왕궁에서 지낸 기간 내내 긴 머리를 말아 올려 쪽을 찌고 파신을 입었다.
인질이자 외교관, 최초로 왕비가 된 후궁
치앙마이는 서쪽으로 버마와 영국, 북쪽으로 샨·중국·라오스, 그리고 동쪽으로 베트남과 프랑스에 둘러싸여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영향을 고루고루 흡수한, 말 그대로 국제도시였다. 다라랏사미는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만큼 새 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사진찍기 취미였다. 다라랏사미의 대표적 사진이 화장대 거울과 전신 거울 앞에서 긴 머리를 풀고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흰색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인데, 시암 왕실의 전통적 스타일을 거부하고 자기 뿌리인 란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란나제국의 문화와 전통을 연구해온 미국의 역사학자 카스트로-우드하우스는 다라랏사미가 란나제국의 외교관이자 인질이었다고 정의한다. 란나제국을 시암의 통치하에 두고 싶었던 쭐랄롱꼰왕은 란나제국의 적통을 자기 후궁으로 삼아 인질로 뒀다. 인질이었지만 개방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쭐랄롱꼰왕의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암 근대화의 아버지’로 부르는 쭐랄롱꼰왕은 아버지 몽꿋왕 때부터 이어진 서양식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근대적인 지방통치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한 데 이어 의무교육을 제도화하고 심지어 왕족 앞에서 몸을 바닥에 밀착해 엎드리는 의식까지 폐지했다. 그런 그에게 시암 왕실의 한가운데에서 란나제국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자기 생활에 흡수한 다라랏사미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쭐랄롱꼰왕의 총애를 시험하는 사건이 다라랏사미가 방콕에 온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1889년에 일어났다. 인타위차야논왕이 샨 왕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상의하러 다라랏사미에게 잠시 치앙마이로 올 수 있겠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본래 시암 왕실에 들어온 후궁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본인의 의지로 궁을 떠날 수 있지만, 임신하고 아이를 낳으면 궁을 떠날 수 없었다. 마침 다라랏사미는 임신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인타위차야논왕이 다라랏사미에게 치앙마이로 와달라고 한 것은 시암 왕조에 대한 반역이 될 수 있기에 다라랏사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쭐랄롱꼰왕에게 아버지의 편지를 보여줬다. 쭐랄롱꼰왕은 인타위차야논왕에게 ‘딸을 방콕에서 데리고 가고 싶다면 좋다, 와서 데리고 가라. 다만 방콕에서 당신은 딸의 주검을 갖고 가게 될 것이다’라고 답신을 썼다.
이 일이 있은 뒤 다라랏사미는 우울증에 빠졌다. 자신을 총애한다고 믿었던 시암의 왕에게도, 그리고 자기 편지를 남편에게 보여줬다고 화난 아버지에게도 모두 버림받은 듯했기 때문이다. 다라랏사미는 그해 10월 쭐랄롱꼰왕의 딸을 무사히 낳았지만, 딸은 2년 반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 충격을 이길 수 없어 다라랏사미는 딸의 사진과 초상화를 모두 불태우게 한다. 그리고 화장한 딸 유골의 반은 치앙마이에, 나머지 반은 방콕에 묻는다.
28년 만에 돌아와 19년간 란나를 위해
1894년 왕비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방황하던 인타위차야논왕은 결국 1897년에 서거한다. 다라랏사미는 아버지 장례식에 가고 싶었지만 쭐랄롱꼰왕은 북부 지역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다라랏사미의 고향 방문은, 왕의 허락이 떨어진 1909년에야 성사된다.
1909년 2월12일, 다라랏사미는 쭐랄롱꼰왕에게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왕궁으로 갔다. 그는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쪽 찐 머리를 풀고 그 머리카락으로 쭐랄롱꼰왕의 발을 닦는다. 사람의 신체에서 발을 가장 천한 부위로 여겼던 시암의 전통을 잘 알았던 다라랏사미는 머리를 가장 신성한 존재로 여긴 버마인의 충성 서약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쭐랄롱꼰왕은 다라랏사미가 치앙마이로 간 사이에 그를 ‘왕비’로 승격하고 왕궁 내 그의 집을 따로 짓게 한다. 이듬해 1910년 쭐랄롱꼰왕이 서거하고, 다라랏사미는 1914년까지 방콕에서 지내다 드디어 1914년 치앙마이로 돌아온다.
28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여전했지만, 치앙마이를 근대화하겠다고 하는 다라랏사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그가 방콕에서 지낸 기간에 옛 란나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시암에 합병됐고, 치앙마이와 시암 왕실은 완전히 주종관계가 됐다. 그런 제국주의자 쭐랄롱꼰왕의 후궁이던 다라랏사미가 치앙마이에 돌아와서 하는 주장이 치앙마이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했던 것이다.
방콕에서도 그러했듯 다라랏사미는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명을 이어갔다. 근대식 병원을 늘리기 위한 기금을 만들고, 농민의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열대과일 용안(longan) 같은 새로운 품종을 소개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하는 등 근대화에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란나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내려 다양한 노력을 했다. 전통무용과 전통극을 계승하는 교실을 만들어 직접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자기 집에 베틀을 놓고 주민들에게 란나 전통 문양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지방 상인들이 란나식 직물이나 전통의류를 만들고 팔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한편으로는 란나 역사를 기록했다. 본인이 경험하고 배웠던 란나 왕실의 전통부터 란나제국의 옛 영토를 구석구석 다니며 수집한 고문서와 사료를 바탕으로 했다. 그렇게 치앙마이에서 지낸 19년 동안 다라랏사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란나제국과 치앙마이 왕실의 기억이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1933년 치앙마이에서 사망한다.
방콕에서도 치앙마이에서도 지켜낸 전통
시암 왕실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였지만 다라랏사미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갖은 멸시와 놀림을 받으면서 방콕에서도 그리고 치앙마이에서도 지켜낸 란나 전통 때문이다. 치앙마이가 타이라는 민족국가에 합병되는 시대적 조류는 막지 못했지만 란나제국의 존재를 시암인에게 각인시키고 란나제국 후손의 자부심을 치앙마이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그런 다라랏사미의 업적을 기리듯 치앙마이 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파신’을 입고 등교한다.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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