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또다시 토요일에 시작된 전쟁…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갈등과 분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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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많은 군사 작전과 도발, 공격이 안식일에 일어난 데는 상대적으로 군의 준비 태세가 느슨해진다는 점도 고려됐을 겁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4차 중동전쟁, 이른바 욤키푸르 전쟁이 시작된 것도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10월 첫 번째 토요일,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점령, 포위하고 있는 가자지구의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감행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해결의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대표적인 분쟁입니다. 서로 자기 땅을 상대방이 근거 없이 점령 또는 점유해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에서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접점을 찾기가 정말 어려워 보이던 문제는 1993년, 오슬로 협약에서 이른바 ‘두 국가 해법’에 양측이 합의하면서 실마리를 찾는가 싶었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싸움이 일어났을 때 양측의 주장을 공평하게 듣고 잘잘못을 가리기는 정말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참전한 전쟁일 땐 말할 것도 없고, 제삼자라고 해도 동맹 혹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나라의 주장에 더 귀 기울이게 되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아랍 국가 사이의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50년 전 욤키푸르 전쟁 때는 냉전이 한창이던 중에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북한이 소련과 함께 이집트, 시리아를 지원했으므로,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시각에서 정세를 보는 편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이므로, 미국 정부는 분쟁이 날 때마다 이스라엘 편에 섭니다. 미국 언론에 소개되는 칼럼이나 분석도 아무래도 이스라엘 편에 선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칼럼도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에서 내린 평가도 여러 군데 보입니다.
[ https://premium.sbs.co.kr/article/zB30l-eZ7gA ]
[ https://premium.sbs.co.kr/article/cOZPPESrWmU ]
대표적인 부분을 하나만 꼽자면, “하마스가 즉각적인 도발도 없는 상황에서 왜 지금 전쟁을 일으켰을지 의아하다”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프리드먼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인정되던 곳에 계속해서 늘어나는 유대인 정착촌, 정착촌을 지으면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내쫓는 과정에서 빈번히 자행되는 폭력, 이를 노골적으로 방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이스라엘 극우 정파에 아슬아슬한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 말도 못 하는, 어쩌면 안 하는 네타냐후 총리의 비겁함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정착촌 건설 과정만 놓고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비교적 명확히 갈리는데, 피해자가 받는 고통을 가해자 편에 서서 재단하는 건 정당하지 않죠. 심지어 프리드먼은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연정 때문에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는 주장을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꾸준히 개진한 논객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에서 부쩍 늘어난 폭력 사태를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밸푸어 선언과 시온주의 운동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가 설립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밸푸어 선언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사실 대중에 공표한 선언이라기보다는 개인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이었지만, 어쨌든 유대인 국가 건립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 운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오랜 세월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소수 인종, 소수 민족으로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선조들이 살던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대영제국과의 약속을 통해 이루고자 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은 전 세계 제국들이 편을 갈라 싸운 전쟁이었죠. 주요 승전국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미국이었고, 패전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사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노리고 아랍 지도자들과도 밀약을 맺습니다.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키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아랍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이었죠. 유대인과 아랍인들 중 한쪽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셈입니다.
UN의 분할안과 나크바
이 시기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크바(النكبة)라고 부릅니다. 나크바는 아랍어로 재앙이라는 뜻인데,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의 보호령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땅에서 수많은 아랍인들을 살해하고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마을 500여 개가 파괴됐고, 1만 5천 명이 살해됐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 75만 명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냈고,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점령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후퇴해 포위됩니다.
나크사와 6일 전쟁
이어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엿새 만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시리아 영토였던 골란고원과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반도를 점령했습니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점령군 치하에서 갇혀 살게 됐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6일 전쟁을 나크사(النكسة)라고 부르는데, 나크사는 아랍어로 후퇴라는 뜻입니다.
이후 1967년 12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따르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결성됩니다. 해방인민전선은 이스라엘 정부나 유대인을 상대로 테러 공격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좁은 땅으로 몰아넣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도 유대인은 법에 따라 1등 시민이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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