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요? 재수도 했어요… 노력은 빛을 봅니다” 30대에 세계 석학 최순원 MIT 교수 [김현수의 뉴욕人]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공대(MIT) 물리학과. 라운지 같은 공간에 분필 칠판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암호문 같은 수식이 빽빽한 칠판 앞에서 연구원들이 영어 중국어 독일어로 곳곳에서 토론 중이었다.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이 떠올랐다.
“물리학이라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는 공유하면서 발전될 수 있거든요.”
최순원 MIT 물리학과 교수(36)의 연구실에도 벽 하나를 차지한 칠판이 보였다. 세계적인 양자 물리학자로 꼽히는 최 교수는 양자시뮬레이션, 양자계측, 양자정보이론, 양자인공지능, 양자계산 및 알고리즘 개발 등 양자과학 전 분야에 걸친 연구 논문을 유력 학술지에 게재해 왔다. 아직 30대지만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편수가 약 18편에 이른다.
양자 과학은 미래 기술 전쟁의 핵심으로 불리는 분야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전 물리학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미시 세계. 이 곳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물리 현상들을 이용해 컴퓨터, 인공지능, 신약 전 분야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제 37회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을 계기로 MIT 연구실에서 만난 최 교수는 양자과학을 두고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재미있는 학문”이라며 웃었다.
―대전과학고, 칼텍 학부, 하버드대 석·박사, MIT 교수…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의 ‘트렌드’가 된 의대가 아닌 물리학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주변에서는 의대 얘기를 굉장히 많이 꺼냈지만 가족도 저도 의대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며 자랐는데, 아버지는 ‘최대한 가능성을 넓히는 방향으로 선택하라’고 조언해주셨죠. 의사로의 인생을 생각하면 재미없게 느껴졌고, 가능성을 열어가고 싶었어요.”
―양자과학에 빠진 계기는 뭔가요?
“칼텍 학부시절 인생을 바꾼 수업이 있었어요! 칼텍은 다른 전공 과정을 수강하도록 해서 물리학과 비슷한 게 뭐가 있을까 보다 전산학의 정보 이론을 수강해봤죠. 정보처럼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개념을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물리의 질량, 부피처럼 정보도 정량화할 수 있고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렸습니다. 이미 고도화된 기술로서 정보학을 공부하기보다 순수 자연과학 차원에서 정보를 깊게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자연과학에서 근간이 되는 것이 양자역학이니 양자역학과 정보학을 합친 ‘양자정보과학’이 제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석사 때부터 양자정보과학을 연구한 건가요?
“학부에서 바로 양자정보과학 전공 교수님이 있는지 찾아봤죠. 놀랍게도 그 분야 대가인 존 프레스킬 교수님이 칼텍에 계신 거예요. ‘제가 아직 학부생이지만 교수님 연구그룹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라고 e메일을 썼는데 답장을 안주시더라고요. 이력서를 들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한번 봐달라고 하니 그냥 테이블에 놓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다음 주에 또 가서 창문 너머로 보니 제 이력서가 올려놓은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읽어보시지 않은 거죠. 다시 가서 ‘하나 더 놔드릴게요’ 하고 이력서를 두고 왔습니다. 그렇게 매주 들려서 여쭙던 게 한달 쯤 되자 교수님이 저를 불러 세우시더라고요.
‘나는 웬만하면 학부생들과 연구하지 않는다. 다른 교수를 찾아라.’
‘저는 아무 연구나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꼭 교수님과 양자 연구를 하고 싶은 겁니다. 교수님께서 아직 고려하시는 단계라면 좀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지만 너무 속상해서 학교 운동장을 한 20바퀴, 한 시간 넘게 뛰었어요. 포기해야하나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열었더니 교수님 e메일이 와 있는 거예요. 연구실 박사들이 제안해 준 4개 연구 주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포기하라고 하신 게 저를 테스트해보셨던 것 같아요. 교수님은 지금도 조언을 주시는 제 인생의 멘토입니다.”
최 교수가 학부시절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프레스킬 교수의 연구실에 합류했을 때 쟁쟁한 동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챗GPT의 설계자이자 오픈AI 공동 창업자인 존 슐만도 있었다.
―2017년 하버드대 박사 과정 중에 ‘시간 결정(Time Crystals)’을 세계 최초로 구현해 네이처지 표지를 장식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걸 48시간 만에 해냈다는 게 사실인가요?
“연구 제안을 쓰고 실험 결과가 나오기까지 48시간이지만 사실 3년 이상 그 개념을 배우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던 것 같아요. ‘결정(Crystal)’은 물리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요, 소금을 생각해보세요. 소금 결정은 어느 면으로 깎아도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그런 공간 속의 ‘결정체(crystals)’처럼 시간이 흘러도 물질의 원자구조 등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해서 변화하는 물질을 시간 결정이라고 합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에너지가 높다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안정화해서 원자들을 동기화 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어요. 어느 날 공부 중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바로 연구제안서를 썼죠. 동료였던 실험 물리학자 최준희 현 스탠퍼드대 교수가 실험으로 이를 구현했습니다.
사실 이 연구는 소속 연구실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그냥 저희가 궁금해서 시작한 거라 업무를 다 끝내고 하고 싶던 연구를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한거죠. 다음 날 최 교수님이 ‘된다’고 보내줬던 카톡 소리가 잊히질 않네요. 와, 정말 기뻤습니다.”
―서른 살이셨는데… 불금 대신 연구를 하신 건가요?
“저희 생각이 맞다면 세계 최초로 어떤 물질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니 진심으로 궁금했고 이게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던 거죠. 시간 결정 논문은 제 다른 논문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저에게 큰 힘을 줬어요. 박사 4년차에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그때 연구가 잘 안 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다른 길을 가야하는 것인가 좌절할 때도 있었죠. 48시간 만에 아이디어를 구현했지만 이는 결국 수년 동안 쌓았던 노력이 바탕이 된 것이잖아요.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줬습니다.”
―‘천재’로서 탄탄대로를 걸으신 것 같은데 좌절의 순간이 있었다니요?
“박사 3년차 무렵에도 힘들었죠. 친구들은 다들 논문도 잘 쓰는데 나만 못하는 것 같아 한참 괴로웠습니다. 지도교수님께 솔직하게 ‘제가 못하면 못한다고 피드백을 달라. 그래야 향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잘하고 있고, 성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만 고르고 빨리 풀고 논문을 쓴다. 하지만 정말 풀어야할 문제를 선택해서 어렵지만 끝까지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굉장히 어렵겠지만 우리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이는 지금 제 제자들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 탄탄대로 같아 보인다지만 사실 재수했어요. (웃음) 영어도 잘 못했고요. 과학고 조기졸업 후 삼성장학재단 유학 장학금 지원에 선발됐는데 정작 지원 대학은 다 떨어진 거예요. 국제 경시대회 수상도 있고 해서 당연히 어디 하나는 붙을 줄 알고 가족이 이미 함께 미국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요. 공무원이신 아버지(현 최민호 세종시장)는 해외 연수, 어머니는 휴직, 누나는 휴학을 신청한 거죠. 재수생으로 미국에 가서 막막했습니다. 장학금 없이 비싼 미국 대학에 다닐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삼성에서 그 다음해에도 뽑아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은사께서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달라는 편지를 삼성재단에 보내주신 것 같더라고요.
재수시절 워싱턴 디씨 인근에 살며 주변 대학 물리학 교수님들께 무작정 인턴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e메일을 보냈었어요. 다행히 조지타운대 교수님께서 답을 주셔서 대학 지원서에 경험을 얹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판 수능인 SAT는 1년 공부를 더 했는데도 1점도 안 올랐어요.(웃음)”
―과학전공이 아닌 사람 입장에선 ‘양자과학 연구가 나와 무슨 상관이지, 세상을 어떻게 바꾼다는 것이지’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100년 전 트랜지스터 개발하는 분을 인터뷰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컴퓨터라는 걸 만들어서 뭐하려고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회계 정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초창기 연구자들은 지금과 같은 세상을 상상하며 컴퓨터를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컴퓨터를 만들었으니까 이후에 스마트폰, 인터넷, 컴퓨터 게임 등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거죠.
저는 양자컴퓨터나 양자시뮬레이터도 100년 전 트랜지스터와 같다고 생각해요. 이게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모른다고 안주할 수는 없죠. 뭐가 달라질지 누군가는 연구해 나가는 겁니다. 자연을 더 이해하고 싶고요.
우리가 사는 고전 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자 현상을 우리 세상으로 끌어오면 모든 게 바뀔 겁니다. 사람들은 에너지를 볼 수 없고 전기가 작동되는 원리를 구체적으로 모르더라도 그게 우리 삶을 바꾼 걸 알죠. 미래에는 사람들이 양자라는 말을 달고 살 거라고 믿어요.
양자컴퓨터는 단순히 속도가 빨라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며 점진적변화가 아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예를 들어 현재 암호체계는 소인수분해를 활용한 것인데 양자컴퓨터는 순식간에 이를 풀어서 현재 암호화 시스템 보안을 깨버려요. 또 미래에 양자 시뮬레이터는 화학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있도록 해 신약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렇게 이미 양자과학은 컴퓨팅, 암호, 신약 등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를 바꿀 겁니다. 순수 과학자로서 새롭게 자연을 이해하고 실용 부문에도 기여하는 학자가 되고 싶어요.”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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