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률에 눌리고 복권에 꽂힌 중국 청년들 [최정봉의 대박몽]

2023. 10. 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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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을 저주한 덩샤오핑은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을 제2의 혁명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주석 등극 7년 차  1985년 베이징의 젊은이들은 디스코에 열광했고 일본산 오토바이가 도심을 누볐으며 약 5000만 명이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계획 경제=사회주의’, ‘시장 경제=자본주의’ 공식을 폐기하고 중국식 경제 모델을 약속했다. 다수 인민은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가릴 것 없이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전향적 발상을 지지했다.

개혁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집단 윤리를 저버리고 인민을 소비주의 환락에 빠뜨린다는 반발이 공산당 내에서 끊이지 않았다. 권력 내 불협화음은 경제 정책의 혼선을 야기했고 그가 도입한 복권 경제는 전환기의 기니피그가 되고 말았다.


복권으로 잡은 쥐

1984년 9월 시장 경제 실험의 일환으로 도입된 복권은 불과 6개월 만에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공공 행사의 프로모션, 물품 판매의 유인책 그리고 행정 정책의 효율을 명분으로 복권이 남발됐다. 균등 분배의 무미건조에 지쳐 있던 인민들에게 승자 독식의 복권 원리는 자극적인 MSG와 같았다. 그만큼 오용도 많았고 부작용도 잦았다.

상하이 중심부 황포구에서 실시된 쥐잡기 캠페인을 사례로 들어보자. 1984년 겨울 황포구는 위생 혁신의 일환으로 포획한 쥐를 관청에 건네면 복권을 나눠 줬다. 하지만 발행된 2만 장 복권 중 단 2명의 당첨자에게만 전기장판을 지급하는 행정 미숙을 드러냈다.

포상 때문에 주민들은 여러 마리의 쥐를 잡고서도 한 마리만 전달했다. 포획한 쥐를 가족 성원끼리 나눠 최대량의 복권을 확보하려는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또 2만 장의 복권이 매진되자 누구도 쥐 포획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복권 결합형 쥐잡기 캠페인’은 초라한 성과만 남기고 퇴출됐다.

그해 10월 베이징 마라톤 후원사들도 대중적 참여를 위해 5만 장의 복권을 발행했다. 1등 냉장고, 2등 컬러TV, 3등 세탁기, 4등 조깅화(2500벌)가 제공되자 복권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그 대신 추첨이 진행된 당일 행사장에는 걷기도 힘든 노인, 장거리 경기에 부적합한 어린이들과 임산부들이 대거 등장해 반쪽짜리 행사가 되고 말았다.

각종 시행착오와 역효과에도 불구하고 복권 사업은 시장 경제의 마중물로 여겨졌다. 영화관·신문사·무술협회 등 민·관 할 것 없이 뛰어들었고 지방 정부들도 주택 건설, 도로 정비 등 공공사업 재원의 손쉬운 해법으로 복권에 의존했다. 사회주의하에서 무뎌진 성공 심리를 자극하는 신선한 유인책으로 환영받았지만 물욕이 이끄는 경제 사조에 경계심을 보인 당간부도 늘어 갔다.


춘제 갈라쇼 사건

1985년 2월 19일 중국중앙TV(현 CCTV) 방송은 보수층의 잠재 공분을 증폭시켰다. 새해맞이 갈라쇼에 화려한 의상의 홍콩 연예인이 다수 등장했고 중국 출신 가수들도 미국 팝송풍의 음악을 부르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자본주의 엔터테인먼트 쇼를 모방한 것도 모자라 프로그램 중간에 복권 추첨을 삽입해 화를 자초했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비판의 물꼬를 텄다.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한 국영 방송에서 컬러 TV와 금은메달을 명절 경품으로 제공하는 장면은 중국 인민을 소비 물자에 굶주린 경품 중독자로 폄훼하는 수치스러운 연출이었다는 논조였다.

사설은 도박 금지를 선포했던 1949년 마오쩌둥 정권의 어조를 차용해 “복권의 범람은 경마와 투견에 전 재산을 걸었던 봉건 시대로의 역행이며 사행심과 투기를 건설적 경쟁으로 오인하는 반혁명적 조류”라며 복권 제도 전반에 걸쳐 맹공을 퍼부었다.

개방 정책의 나팔수였던 경제일보도 거들었다. “물품 판매에 동원된 복권은 불필요한 소비를 유발하고 시장 수요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 무분별한 생산으로 이어진다”며 복권을 빌미로 한 재고 처리나 조야한 경품 제공으로 취한 이익은 부정행위에 속한다고 경고했다.

사태가 커지자 중국중앙TV는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자기비판을 게재했다. 중국 내각인 국무원도 발빠르게 대응했다. 공공 복지나 저축 권장 목적을 제외한 일체의 복권 추첨과 경품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시장주의 고양이’였던 덩샤오핑의 복권 경제는 많은 ‘쥐’를 잡지도 못한 채 6개월 만에 강판당했다.

카드게임에 열중하는 등소평 / 사진=포브스



카드게임에 열중하는 덩샤오핑. (포브스)


청년 실업률과 복권 판매율

이후 38년, 흑묘백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 중국에서 최근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헝다의 미국 파산 신청, 비구이위안의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이어 중룽국제신탁의 환매 중단까지 대규모 금융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지방 정부의 과도한 부채와 경기 침체를 감안한 당국의 부동산세 유예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 와중에 사상 최대 활황세를 보인 반전의 섹터가 등장했다. 바로 복권 판매다. 5월 하순 발간된 중국 재정부 자료에 따르면 4월 전국 복권 판매액은 전년 대비 62% 증가한 503억3000만 위안(약 9조7000억원)으로 10년 내 최대치를 기록했다.

4월이 특별했던 것일까. 아니다. 1~4월 총 판매액을 봐도 전년 동기 대비 49.3% 증가한 1751억5000만 위안(약 32조원)이 찍힌다. 그렇다면 복권 판매 호조는 중국 내수의 반등을 지시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기나긴 코로나19 봉쇄가 풀리고 일상 재개 후 수개월이 지났건만 수출·통화 약세, 저조한 외국인 투자, 기록적인 청년 실업률까지 모든 지표가 우울함에 젖어 있다.

통상 복권 판매의 중기 호조는 실업률 상승과 정비례한다. 경기가 침체될수록 복권 판매율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주목할 대목은 복지 복권이 전년 대비 30.3% 상승에 그친 반면 후발 주자 스포츠복권은 무려 81.8%의 상승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전자에 비해 2.7배 높은 상승률을 보인 스포츠복권은 인터넷 구매를 통한 청년층의 유입으로 탄력을 받았다. 판매 규모가 급성장해 미국의 메가밀리온스 복권에 이어 전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직장과 희망을 잃은 중국 청년층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중국몽 대신 복권 대박몽에 미래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샨룽 칭다오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혼 청년층이 복권 가게로 몰리는 기현상을 경고했다. 베이징 소재 직장인 프레디 샤오(28) 씨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매주 복권을 구입하게 된 경위가 “언제 직장에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4월 청년 실업률은 20.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실제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극한의 청년 실업률을 보면 스포츠복권의 전년 대비 상승률 81.8%가 공포의 지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자판기에서 복권을 구매하는 여성 / 사진=Business Inside



SNS 플렉싱과 복권 자판기

중국 소셜 미디어에는 스포츠복권이나 즉석 복권의 뭉치 구매자들의 영상이 넘쳐난다. 당첨자들의 플렉싱 영상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셜 미디어 빌리빌리(BiliBili)에서는 “복권으로 100만 위안 당첨되는 것이 일해서 100만 위안 버는 것보다 쉽다”는 청년들의 모토가 유행한 지 오래다.
봉쇄 기간 중 우후죽순 생겨난 복권 해설가들은 각종 확률 분석과 전망으로 구매를 자극한다. 상하이 거주 27세 남성 웨인젱 씨도 이렇게 즉석 복권을 시작했다. 복권 판매대가 보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는 그는 매번 50~200위안(약 9000~3만6000원)을 지출한다.

공공장소에 복권 자판기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위태로운 현상이다. 이 때문에 작년부터 쇼핑몰과 지하철역에서 복권 구매 행렬이 생겨났고 온라인이나 QR코드로 간편 구매가 가능해지자 복권 구매 연령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보도했다.

이 난리통에도 재정부는 6월 초 스크래치형 스포츠 복권 20여 종의 발행을 승인했다. 늘어난 젊은층 수요에 부응해 더 다양한 항목을 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반기 스포츠 복권의 호조는 카타르 월드컵 베팅 급증으로 발생한 한시적 현상이라며 청년 실업률과의 상관성을 부인했다.

댄왕 항셍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경기 침체로 재정 적자에 빠진 정부가 자금 조달 해법으로 저소득 청년층의 복권 판매에 열중한다며 격앙했다. 추첨형 복지 복권은 28%의 세율이 적용되지만 신종 스크래치형과 스포츠 베팅 복권은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4월 20.4%을 넘어 5월 20.8%로 상승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더욱이 7~8월 대학을 졸업한 1160만 대군이 일제히 취업 전선에 나섰으니 하반기 청년 실업률은 가히 재앙적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이념과 정책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내세운 중국식 사회주의의 나침반이었다. 취직이든 복권이든 부자만 되면 된다는 현대판 흑묘백묘론은 과연 현실과 이상의 디커플링에 직면한 중국 청년들의 인생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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