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시렁] 바다가 '집'인 기자, 산에서 책을 낭독하다
산에 가서 등산만 하고 오는 건 싫은 남자의 등산 중 딴짓
내 기준으로 세상엔 두 개의 잡지가 있다. 하나는 남성 패션잡지, 다른 하나는 등산잡지(월간산)다. 남성 패션잡지는 화려하다. 내지에 쓰인 폰트부터 시작해 페이지마다 다른 레이아웃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예인과 잘생긴 모델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등장한다. 끝내준다. 멋있다. 등산잡지는 그에 비해 단순하다. 한 페이지에 사진 몇 장과 통으로 된 글이 빡! 들어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스타일이다.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계속 산이 나온다. 와, 뚝심(?) 있다! 그래, 이게 바로 전통 잡지지! 이게 바로 월간<산> 스타일이지!라고 친구들에게 이따금 말하지만 어쩔 땐 패션잡지의 그 화려함이 부럽다. 정확히 말하면 화려한 사진과 페이지, 글을 만드는 패션잡지의 기자가 되고 싶다(연예인도 자주 보는). 가끔 패션잡지의 기자가 된 나를 상상한다. 구수하게 생긴 내가 그 안에서 구린내 퐁퐁 풍기면서 앉아 있다가 냄새 난다고 쫓겨나면서 나는 늘 그 꿈에서 깬다. 아, 궁금하다! 패션잡지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면 어떤 기분일까?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회가 왔다. 패션잡지사 디지털팀 '디렉터'라고 불리는 이재위 에디터에게 산에 가자고 했다.
이재위는 남성 패션잡지 <지큐GQ> 기자다. 디지털팀 소속이다. 그는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소위 '광고 영상'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패션과 관련된 여러 영상과 이미지를 만들어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 업로드한다. 잘 만든다. 인기가 아주 좋다. 화려한 영상과 사진을 만드는 그가 가끔 부러웠다. 이재위는 얼마 전 첫 책을 냈다. 제목이 <오늘 파도는 좋아?>(출판사 핀드)다. 책을 내서 뭐가 좋은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책을 낸 적이 없으니), 이것까지 부러웠다. 약 올라서 불암산으로 오라고 했다(이재위와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산에서 특별한 걸 해보고 싶어서 그에게 물어봤다.
"재위야, 산에서 돗자리 펴고 김밥 먹어본 적 있냐?"
재위가 대답했다.
"겁나게 많죠."
내가 또 물어봤다.
"그럼 산에서 바지 벗고 바람 쐬본 적은? 아니면 산에서 책을 읽어본 적은?"
그가 대답했다.
"ㅋㅋㅋ 없죠."
두 가지 경험 중 그가 어떤 걸 해본 적이 없는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결정했다.
"좋아! 그럼 이번 산행은 산에서 네가 쓴 책 낭송하기다!"
그가 대답했다.
"좋아요."
9월 초 일요일 아침 우리는 불암산 앞에서 만났다. 그는 트레일러닝 복장으로 나타났다. 트레일러닝화를 신고 양말목을 무릎에 닿게 할 속셈인양 양말이 끝없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트레일러닝용 베스트를 착용했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멋있어 보이진 않았다. '패션잡지 기자도 등산갈 땐 나랑 똑같이 후줄근하게 입는구나, 내가 후줄근한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위안이 됐다.
비가 살짝 내렸다. 우리는 불암산 등산로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작가가 된 소감이 어때?"
그가 대답했다.
"내가 쓴 책이 나왔으니까, 작가가 된 건 맞는데, 제 이름 뒤에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아직 많이 모자란 느낌이에요."
그는 대학교 때 국문학을 전공했다. '틈'이라는 시 쓰는 동아리에 가입해 시를 쓰기도 했다. 이때 매주 '합평회'라는 걸 했고, 합평회 때 시를 써서 제출하지 못하면 벌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당시 열심히 시를 썼다. 옛날부터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을 텐데, 결국 시인이 아니라 에세이 작가가 되어 그는 얼떨떨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 파도는 좋아?>는 어떤 책인가? 파도와 산이 대체 어떤 관계가 있길래 그는 이 지면에 등장한 걸까? 이재위는 아웃도어 잡지 출신 기자다. 월간 <OUTDOOR>와 <고아웃>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그는 백패킹, 캠핑, 트레일러닝, 낚시, 스키, 서핑, 마라톤 등을 하면서 산과 바다 도시 등을 온종일 뛰어 다녔다. 지금 이재위가 다니는 회사에선 그에게 이런 별명을 붙였다.
'스포츠계가 빼앗긴 매거진계의 인재'
그는 아무래도 산보다 바다에 더 끌렸던 모양인지 최근엔 파도 타는 데 더 열심이다. 그래서 책 제목이 <오늘 파도는 좋아?>가 됐고, 이 말은 그의 아내가 그에게 하는 인사다. 이를테면 아침인사 같은 거. 내가 해석했을 때 이것은 아내의 체념이다. 나의 아내가 나에게 늘 하는 말 "그냥 나가서 살아!"의 아주 순한 버전으로 들린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그동안 이재위가 바깥에서 벌인 활동들이 기록되어 있다. 산과 아주 관련 깊다.
각종 아웃도어 활동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인지 그는 불암산 오르막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천천히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등산잡지 기자 체면 때문에 참았다. 천천히 가자고 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지금 사람들은 너를 어떻게 불러? 기자? 에디터?"
그가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회사에선 촬영을 많이 해요. 거기 가면 제가 기자인지 몰라요. 감독님, 실장님, 피디님이라고 해요. 촬영장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그 사람들을 통제하고 촬영을 제대로 진행하려면 감독하고 지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보통 제가 해요. 그래서 저는 감독이라고 불리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숨이 나왔다. 오르막을 오르면서 숨이 차서 그런 게 아니라 각종 호칭이 붙은 큰 벽돌 여러 개를 등에 지고 있는 그가 떠올랐고, 그 무게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져보니 이재위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과 햇빛을 찾아 뿌리와 가지를 뻗는 나무, 먹을 걸 얻기 위해 정처 없이 기어 다니는 개미 등. 우리는 왜 이렇게 짓눌리면서 살아야 할까? 우리 모두 그 짐을 좀 내려놓고 쉬면 안 될까(인터뷰 그만하고 앉아서 놀면 안 될까?)? 그런대로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것 같다. 굳이 나서지 않는 것인데, 이재위는 그 반대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그는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잖아? 굳이 그러는 이유가 있어?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지. 혹시 큰 야망을 가지고 있나? 회사 대표가 되고 싶어?"
그가 대답했다.
"야망 같은 거 없고요. 회사에 희생한다는 기분도 들지 않아요. 주위에서 항상 이런 말을 해요. '잡지는 사양 산업이다'라고. 저는 이런 회의적인 이야기를 듣기 싫어요. 일하는 데 도움도 안 되고. 그래서 저는 '잡지를 하면서도 돈 많이 벌 수 있다.' 그런 걸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 '잡지가 메인 산업이 될 수 있다!' 그런 거요. 이렇게 생각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일이 취미생활도 아니고. 이런 사명감은 있어야죠."
"잡지가 사회에 어떤 이로운 영향을 줄까?"
"문화생활에 도움을 주겠죠. 아, 저는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삶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같은 걸 전해주고 싶어요. '이런 게 멋있는 거다, 이런 것이 대단하고 멋진 삶이다.' 같은 거요."
"야, 이거 너무 잘 만들어진 답변 같은데. 브랜드 홍보팀에서 말하는 것 같잖아!"
이재위는 웃기만 하고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약수터를 지나 산등성이를 탄 다음 어떤 바위 꼭대기에 섰다. 경치가 좋았다. 비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면서 주변 봉우리들을 감쌌다. 여기서 그가 쓴 책을 펼쳐 들고 책에 나온 문장 하나를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름과 나무와 바위봉우리가 각각 커피 원두, 설탕, 프림이 되어 그가 쓴 문장 안에서 맛있게 섞일 것 같았다.
"재위야, 여기서 네가 쓴 문장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한 번 읽어보자!"
그는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아, 형.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경치나 구경합시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읽어 달라고 졸랐다. 그는 이윽고 책을 들었다. 그리고 그중 한 문단을 읽었다.
"흠, 흠. 읽을게요. '이후로 나는 산에서 달릴 때마다 과거의 나 자신과 함께했다. 자연에서의 경험은 동료이자 식량이자 도구와 같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면서, 체크포인트를 지나면서, 언젠가 내 인생의 레이스를 모두 마쳤을 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비록 상처와 먼지투성이인 인생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 그때의 웃음이야말로 정직하게 레이스를 마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메달이라는 것을.' 흠, 흠."
그가 낭독을 끝냈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여지없이 좋은 '글'이었다. 믹스커피처럼 달달했다. 하지만 이재위의 목소리는 작았다. 개미한테 말하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몸을 배배 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다른 모습에 놀랐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외쳤다.
"와하하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는 대꾸 없이 책을 덮고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재위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산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체크포인트 하나를 막 지난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만 산에서 내려가자고 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 올라가야죠!"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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