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세계여행] JMT 지도를 바꾼 폭설 일정을 송두리째 바꾸다

김영미 여행작가 2023. 10. 12.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존뮤어트레일 (2) 크랩트리 메도~핀촛 패스
지난겨울에 유례없이 많이 내린 눈으로 4,000m가 넘는 포레스터 패스로 올라가는 길은 한여름인데도 설원이 펼쳐진다.

지난 편에는 존뮤어트레일John Muir Trail, JMT을 북진하며 크랩트리 메도Crabtree Meadow에서 왕복으로 휘트니산 산행이야기를 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세계의 수많은 백패커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존뮤어트레일을 선택하는지를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3,000m가 넘는 패스를 하루에 1번은 넘어야 하는 힘든 고난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걸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다.

포레스터 패스를 넘다

새벽 1시 기상. 30km가 넘는 길을 다녀오고 잠시 텐트에서 꿈같은 휴식을 취한 후 약 6.6km를 걸어서 도착한 월리스 크릭 캠프그라운드Wallace Creek Campground. 배낭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모기떼가 달려든다. 숨쉬기도 어렵다. 그 유명한 밀포드의 샌드플라이 포인트 모기보다 더 심하다. 혼자라면 저녁식사는 건너뛰고 싶을 정도. 밥을 어디로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텐트에 누우니 조금 진정이 된다.

기상과 동시 모기와 전쟁이 시작된다. 끔찍하게 많은 모기를 피해서 일단 텐트 철수부터 했다. 거리는 길지 않아도 해발 4,000m가 넘는 포레스터 패스Forester Pass를 넘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정이다. 출발부터 월리스 크릭을 건넜다. 크릭은 강보다는 작은 개울이다. 첫 번째는 편하게 건넜는데, 두 번째는 물살이 너무 세고 깊어서 물 깊이가 조금 낮은 곳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 건넜다. 어느새 귀차니즘이 생겨서 물을 건너면서 신발도 바꿔 신지 않는다. 아침에는 쌀쌀하지만 오후엔 25℃ 이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지도 신발도 걷다 보면 잘 마른다. 문제는 중등산화에 물이 들어가면 잘 마르지도 않고 발에 물집이 잡힐 수도 있다. 존뮤어트레일을 걷는 대부분의 하이커들이 발목이 없는 트레일 러닝화를 신었던 것이 이해가 간다.

존뮤어트레일에서는 눈이 녹아서 넘친 개울을 건너는 것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다. 포레스터 패스로 올라가기 위해 월리스 크릭을 건너고 있다.

물을 건너니 빅혼 고원Bighorn Plateau. 초록 들판이 사랑스럽다. 아침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이제야 조금 여유를 찾는다. 빅혼 고원 건너편으로 멋진 설산들이 줄을 이어 내 곁을 지나간다. 저 산들은 킹스캐니언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과 세쿼이아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의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이어지는 Great Western Divide 산맥이다. 황량한 사막 같다. 왼쪽으로는 Lake South America. 생긴 모양이 남미 같은가보다. 그저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랄 뿐이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존뮤어트레일' 이정표. 길에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하루에 1번 보기도 어렵다. 포레스터 패스까지는 아직도 8km를 더 가야 한다.

지난겨울엔 유례없이 눈이 많이 내렸다. '지난겨울 캘리포니아 일부 지역에는 약 1,300cm 이상의 눈이 내렸고,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녹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은 5월 현재 최대 약 76cm 넘게 쌓여 있다'는 뉴스도 접해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눈이 많이 남아 있다. 해발 3,000m가 넘는 이곳은 한여름인 지금도 설원이다. 눈이 녹은 곳은 개울물이 넘쳐서 등로가 사라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당연히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수시로 GPS를 확인하며 막힌 등로 대신에 우회할 길을 찾는다.

호수에 오렌지빛 설산이 영롱하게 빛난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빛의 산맥'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눈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울퉁불퉁해진 눈길은 걷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지거나 맨홀같이 빠진다. 가능한 앞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을 찾아서 걸어야 안전하다. 에너지 소모는 엄청나고 속도는 거의 낼 수 없다. 점점 기운이 빠진다.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눈인데 이젠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점점 자주 쉬게 된다. 우리 뒤에서 오던 하이커는 저벅저벅 아주 가볍게 눈길을 걷는다. 그리곤 어느새 우리를 추월했다.

악명 높은 스위치백 구간이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길을 200m 이상 고도를 올려야 하는 길에 만들어졌다.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는다. 죽을 만큼 힘들게 포레스터 패스에 도착. 이곳의 높이는 4,009m. 존뮤어트레일에서 유일하게 4,000m를 넘는 패스이다. 막힘없이 360도로 펼쳐지는 장엄한 설경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양쪽의 경치가 너무나 다르다. "와~~" 감탄사만 연이어 나온다. 사진 찍는 지금 이 순간엔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걸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포레스터 패스는 킹스캐니언국립공원과 세쿼이아국립공원이 만나는 곳이다. 우리가 올라온 길은 킹스캐니언국립공원이고 이제 가야 할 길은 세쿼이아국립공원이다. 풍경도 킹스캐니언국립공원으로 올라오는 길은 완전 돌길인데 세쿼이아국립공원은 설원이다. 해외 트레일을 많이 다녀봤지만 참으로 생경한 풍경이다. 그런데 저 설원으로 내려가야 한단다. "정말???" 그렇다 저기에 발자국이 있다. 이정표가 거의 없는 존뮤어트레일에선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우리의 길이 된다.

조심해서 걷느라 2km 거리가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해발고도 3,200m 지대에서 텐트를 쳤다. 고도가 높아서 날씨는 꽤 쌀쌀하지만 모기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너무 힘들었는지 입맛이 사라졌다. 저녁식사를 할 수 없어서 국물만 조금 마셨다.

포레스터 패스의 악명 높은 스위치백으로 오르기 직전 무명의 호수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글렌 패스를 넘다

새벽 4시 기상. 랜턴 빛에 의지해 칠흑 같은 길을 걷는다. 길은 설악산 황철봉 구간 만큼이나 온통 험악한 바위들이 가득하다. 돌길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길. 이 눈길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3km 정도 내려오니 눈길이 끝나고 아침 햇살에 바위산들이 오렌지빛으로 변한다. 호수에 오렌지빛 설산이 영롱하게 빛난다. 오렌지빛과 흰색의 어울림이 참으로 화려하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빛의 산맥'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 빛을 받으며 산을 내려간다. 식사도 하지 않고 걷지만 새벽 하이킹은 언제나 몸도 마음도 가볍다. 특히 이렇게 멋진 아침 햇살을 온 몸으로 받는 날은 참으로 경쾌하다.

물의 수위가 많이 올라가 있는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 위에 길이라곤 통나무가 전부. 미끌미끌하기까지. 여자들은 배낭을 벗어놓고 건넜지만 맨몸으로도 그리 굵지 않은 통나무 위를 걷는 것은 마치 서커스에서 줄을 타는 것같이 무척 긴장된다. 이렇게 물이 지천이니 식수 조달은 무척 편하다.

포레스터 패스에서 바라보는 세쿼이아국립공원. 막힘없이 펼쳐진 장엄한 설경에 감탄도 잠시 이 길을 따라 내려오는 2km 가까운 하산 길은 긴장의 연속이다.

다른 구간보다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참 많다. 지난겨울에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쓰러진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 곁에는 아주 작은 꽃들이 바닥에 지천이다. 혹독한 지난겨울을 어찌 지냈을까?

전날 걸어야 했던 센터 배신 크릭Center Basin Creek 캠프그라운드까지 5km나 걸었다. 어제 내려오지 않길 다행이다. 어제 정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내려왔더라면?

샬럿 레이크Charlotte Lake 도착. 등에 멘 배낭은 무거워도 아름다운 자연에 그저 숙연해진다. 굽이굽이 시에라네바다산들이 흘러간다. 장엄한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저 홀린 듯이 바라본다. 영상으로도 담겨지지 않는 이 느낌은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두 개의 호수를 넘고 글렌 패스Glen Pass(3,635m)에 도착. 힘들긴 하지만 어제 포레스터 패스에 비하면 한결 수월하다. 설산들이 늘어서고 파란 호수가 반짝이는 엽서풍경은 오늘 수고에 대한 보상이다.

타부스 패스를 넘어서니 눈 구간도 그리 길지 않아 한결 걷기가 편하다.

이제 레이 호수Rae Lakes로 향한다. 하산 길도 눈이 가득하지만 다행히 미끄럽지는 않다. 어퍼 레이 레이크Upper Rae Lake에서 미들 레이 레이크Middle Rae Lake로 건너가야 하는 징검다리는 물속에 잠겨 있다. 물살도 빠르고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깊지만 다른 곳은 더 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곳 해발고도는 3,320m. 3,000m 이하로는 언제 가보나?

오늘 박지는 미들 레이 레이크 캠프그라운드. 이젠 휴식시간이다. 아직 훤한 대낮인데 벌써 자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호숫가에서 물에 떠 있는 녹색부유물을 걷어내고 빨래도 하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비누는 사용할 수 없어서 그냥 맹물로만 감았는데 너무 시원하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이 살아가는 데 그다지 필요 없음도 배우는 중이다.

일정을 수정하다

오늘이 벌써 6일차. 아침에 일어나니 분위기가 좀 심각하다. 예정된 시간에 기상은 했지만 출발은 느지막하게 7시라고 말씀하신다. 생마님과 도도님은 레인저사무실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식량을 구할 의도였는데 사무실 문이 잠겨 있었다고 한다. 대장님은 일단 예정대로 진행하긴 어려워서 조금 천천히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식량은 등로에서 만나는 하이커들에게 도네이션을 요청해 보자고 하신다.

개울물이 깊고 유속이 빠른 곳은 안전을 위해서 자일을 잡고 건넌다.

출발하고 조금 걸어가니 남자 두 분이 캠핑을 하고 있다. 여분의 식량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곰통을 열 수 없단다. 곰통을 열면 음식을 주겠다는 말에 생마님께서 힘들게 성공! 곰통에는 신라면도 들어 있다. 곰통 뚜껑에 나무진액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신라면, 육포, 초콜릿을 득템했다. 이 산에서도 뜻이 있는 곳이 길이 있구나. 그러나 행운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페인티드 레이디Painted Lady산 주변 산군들의 반영이 비친 레이 호수가 참 화려하다. 호수에는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송어가 무척 많다. 송어낚시는 별도의 퍼밋이 필요하다.

지난겨울 폭설로 부서졌던 우즈 크릭Woods Creek에 있는 출렁다리는 다행히 보수되어 있다. 우즈 크릭으로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마치 폭포 같다. 어찌나 우렁차고 격하게 흐르는지 잘못 들어갔다가는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굉음의 폭포소리를 들으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도가 심한데다 햇살도 따갑고 어제 호수 부유물 때문인지 눈 반사 때문인지 오른쪽 눈이 자꾸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운 길이다. 눈을 뜨기가 불편해서 반쯤 감고 걸으니 걷는 속도는 점점 떨어진다.

타부스 패스를 넘어서 중간 탈출. 존 뮤어 트레일의 부담감도 벗고 모처럼 캠핑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핀촛 패스를 넘다

어제 늦게까지 산행을 해서 오늘은 조금 여유 있게 기상을 했다. 눈 상태도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다. 핀촛 패스Pinchot Pass(3,697m)까지 가는 길은 거리는 그리 길지 않은데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핀촛 패스에서 홀로 트레킹을 하는 캐나다 친구를 만났는데 캐러멜 하나를 건네준다. 어찌나 맛있던지. 아이처럼 그의 곰통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인연이었던지 트레일 끝나고 요세미티 캠프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났다.

핀촛 패스에서 쉬면서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일정을 하루 늦추어서 진행하고는 있지만 식량도 배터리도 모자라는 상황. 텐트를 2인이 함께 쓰고 있으니 진행팀 2명과 우회팀 4명으로 팀을 나누었다. 진행팀은 원래 계획대로 트레일을 계속 진행하고 나를 비롯한 우회팀은 일단 하산했다가 식량을 구입하고 배터리를 충전해서 다시 올라오기로 했다.

진행팀이 필요한 음식과 장비를 가지고 먼저 출발했다. 우회팀은 핀촛 패스에서 타부스 패스Taboose Pass를 넘어서 하산하기로 했다. 하루 만에 하산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어서 이틀 동안 여유 있게 걷기로 했다. 걷다가 쉬고 하늘도 맘껏 바라보고 존뮤어트레일의 부담감을 벗고 자유인이 되었다. 광활한 평원이 나왔고 우린 이곳에 텐트를 쳤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서 타프도 쳤다. 타프 안에서 햇볕도 피하고 바람도 느끼고 캠핑의 즐거움을 느낀다.

타부스 패스를 넘고 계곡을 건너니 까마득히 멀리 마을과 도로가 보인다. 마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타부스 패스를 넘다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샤워도 할 수 있고 비누세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볍다. 매일 시리얼로 아침을 먹다가 밥다운 밥도 준비했다. 가스가 넉넉하니 라면도 제대로 익히고 햄도 듬뿍 넣어서 맛도 좋다. 간식으로 북어를 살짝 구웠다.

거의 매일 어둠 속에서 걷다가 날이 밝은 후에 햇살을 받으며 출발! 타부스 패스Taboose Pass(3,479m)를 넘는 것도 어느 패스보다 쉬웠다. 이렇게만 내려가면 좋겠다. 한참을 신나게 내려왔는데 계곡물이 장난이 아니다. 돌아갈 길도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신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시지 않았다. 물살이 너무 빨라서 자일을 잡고도 건너기 쉽지 않은 계곡이다. 무섭기도 하고 긴장도 되지만 내색을 할 수 없다. 아마 다른 분들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한 사람씩 계곡을 무사히 건넜다. 계곡을 건너와서 봐도 아찔하다. 모두 건넜으니 자일을 수거할 줄 알았는데 그냥 두고 간단다.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시 수거하러 가기엔 위험 부담도 있단다.

이때부터 참 지루하고 먼지가 푹푹 나는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까마득히 멀리 마을과 도로가 보였다. 참으로 반가웠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만나는 기분이 이럴까? 테이블마운틴 같은 그 언덕만 보고 걸었다.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지만 어느새 그 테이블마운틴이 내 곁에 있다.

드디어 타부스 패스 트레일 입구. 레인저사무실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허허벌판 그냥 사막이다. 사람 그림자도 없는 이곳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3편에 계속>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