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성을 합쳐 가족 이름으로, 독일의 새 가족법
‘가족 성(姓)’을 기존보다 폭넓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준비가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8월 독일 연방정부는 법무부가 작성한 ‘이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승인했다. 이 법률 개정안에 따르면, 결혼한 부부는 자신들의 성을 합쳐서 가족 성을 만들 수 있다. 당장 시행되는 것은 아니고 의회(상원-하원)를 통과해야 한다. 사민당·녹색당·자민당 연정으로 구성된 현 정부는 연정 합의에서 이름에 대한 법률 개정을 약속한 바 있어 의회 통과 전망이 어둡지는 않다. 정부는 2025년 1월부터 법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목표를 잡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여기 막 결혼식을 올린 코넬리아 메르켈과 막스 숄츠가 있다. 현재 법률에 따르면, 부부는 가족 성으로 메르켈이나 숄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개정안이 통과되면 ‘메르켈-숄츠’ 혹은 ‘숄츠-메르켈’처럼 두 사람의 성을 합친 ‘이중 성’을 가족 성으로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이중 성’을 가진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 이 경우에는 ‘이중 성’ 두 개를 합친 성을 만들 수 없다. 다만 각자의 ‘이중 성’ 중 하나를 택해 새로운 성을 만들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메르켈-숄츠와 그라프-뮐러가 결혼할 경우 메르켈-그라프, 메르켈-뮐러, 숄츠-그라프, 숄츠-뮐러를 가족 성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마르코 부시만 법무장관은 8월 이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현재의 법이 시대에 뒤떨어진 성역할에 기초하고 있으며 비이성적이고 관료주의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개정안은 가족법의 현대화를 위한 시작이 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는 부부 중 한 사람의 성만을 가족 성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다만 부부 중 자신의 성을 가족 성으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이중 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독일 전 국방장관인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가 이런 경우이다. 그의 결혼 전 성은 크람프였다. 카렌바우어는 남편의 성이었다. 부부는 남편 성인 카렌바우어를 가족 성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현재로서 부부의 자녀는 ‘카렌바우어’라는 성을 물려받게 된다.
개정안은 자녀의 성 선택에 관한 내용 또한 포함하고 있다. 만약 부모가 각자 성을 유지할 경우 자녀는 지금처럼 부모 중 한쪽 성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부모의 성을 모두 사용하는 이중 성을 쓸 수도 있다. 또 부부가 아닌 파트너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도 부모 양쪽의 성으로 만든 이중 성을 쓸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사용하던 성 대신 부모의 성을 가지고 조합이 가능한 다른 성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된다. 부모가 이혼해 가족 성이 변경될 경우 아이의 성을 변경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가족 성에 관한 독일 법률은 수십 년에 걸쳐 변화해왔다. 현재 법률은 1976년부터 적용된 개정안에 기초하고 있다. 이전까지 독일에서는 결혼한 가족의 경우 무조건 남성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이는 1794년 프로이센에서 출발한 법률안을 따른 것이다. 다만 1957년 개정안을 통해 여성의 경우 자신의 기존 성을 가족 성인 남성의 성 뒤에 단 이중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동전 던지기로 ‘가족 성’ 결정했지만
하지만 이런 법률은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75년 새로운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1976년 7월1일부터 여성의 성도 남성의 성과 동등하게 가족의 성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양쪽 중 자신의 성을 가족 성으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이중 성을 사용할 수 있고, 이중 성의 순서는 임의로 선택 가능하다.
그러나 개정안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부부가 성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경우 자동으로 가족의 성은 남성의 성을 따르게 돼 있었고 사회적 통념 때문에 부부가 여성의 성을 가족 성으로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1985년 결혼을 앞둔 저널리스트 케르스틴 클람로트는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클람로트는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결혼 후 성을 어떻게 정할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결혼 당사자 두 사람 모두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터라 이미 자신들의 이름을 통해 많은 글이 발표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직업적으로 자신의 성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동전 던지기를 해 새로운 가족의 성을 결정하기로 했다.
동전은 여성인 클람로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문제는 가족과 친지들의 반응이었다. 클람로트의 부모와 시어머니 그리고 친구들 중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컸다. 클람로트는 남편의 자존심을 꺾는 사람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런 방식으로 여성의 성을 따르면 결혼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특히 시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그 과정에서 클람로트는 이런 압력 속에서 여성들 대부분이 자신의 성을 포기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더라도 각자가 자신의 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클람로트는 변호사인 자신의 대모에게 이 문제를 논의했다. 대모는 클람로트의 결혼식 선물로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헌법소원의 근거는 독일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 제3조가 명시하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이었다.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가족 성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고 관청에 신고한 뒤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법률에 따라 자동으로 두 사람의 가족 성은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1991년 독일 헌법재판소는 가족 성에 관한 기존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위헌 판결에 따라 1994년부터 새로운 법이 발효되면서 결혼한 사람도 기존 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 성을 결정해야 하는 의무도 사라졌다.
71.9%가 남성 성 따라
독일에서는 직업이나 공식적인 업무에 성을 사용한다. 따라서 자신의 기존 성을 쓰는 것은 직업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경우 어릴 때 성은 메르켈이 아니라 카스너였다. 하지만 1977년 결혼한 첫 번째 남편의 성을 따라 메르켈이라는 성을 갖게 된다. 그는 이혼한 뒤에도 메르켈이라는 성을 유지했고, 1998년 두 번째 남편인 요아힘 자우어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해서 메르켈이라는 성을 사용한다. 메르켈이 계속해서 첫 번째 남편의 성을 쓰는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인이라는 특성상 이미 잘 알려진 성을 바꿀 경우 여러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에 기존 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남편 요아힘 자우어의 경우도 자기 성인 자우어를 유지 중이다. 만약 1994년 이전에 메르켈이 두 번째 결혼을 했다면 메르켈이나 남편 중 한 명은 성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지난 3월 독일 언론 〈차이트〉가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부부가 각자 성을 유지하거나 여성의 성을 가족 성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의 성을 가족 성으로 쓰는 것이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다. 동성 부부가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 이뤄진 부부의 경우 71.9%가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랐다. 16.2%가 각자의 성을 사용했고 5.7%만이 남성이 여성의 성을 사용했다. 이름 연구학자인 안네 로자르는 〈차이트〉와 한 인터뷰에서 남성은 결혼하면 여성의 성을 따를지 여부를 거의 고민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적 전통에 의해 계속해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르는 일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가족 성에 대한 인식 변화는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시민에게서 천천히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성의 성을 따르기보다는 각자의 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성을 정체성으로 유지하려는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부의 성을 합친 이중 성은 가족 결합의 상징으로 공동의 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하면서도 남성의 성만이 살아남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된다.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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