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때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 살펴보니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의혹은 윤석열 대통령이 수사팀장으로 참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가장 공들인 수사 중 하나로 꼽힌다. 2016년 12월15일 특검 인원 구성을 마친 직후 첫 번째로 한 조치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출국금지(블랙리스트 작성 개입 의혹)였다. 이후 특검팀은 거의 매일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했다. 전현직 청와대와 정부 부처 장차관급 등 고위공직자들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2017년 2월7일 특검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을 주도한 혐의(직권남용 등)로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 등을 구속 기소했다. 김기춘 전 실장 등에 대한 공소장을 보면, 당시 청와대와 문체부는 김 전 실장 지시에 따라 단체 3000여 곳과 개인 8000여 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이른바 ‘좌편향’ 단체와 개인으로 분류한 블랙리스트였다. 블랙리스트는 지속적으로 보완됐고 명단에 한번 이름을 올린 이들은 꾸준히 감시를 받았다. 문체부 산하기관의 각종 지원사업에서 좌편향 인사와 단체를 선별해 배제했다. 훈장, 포장 등 포상 및 여러 인선에서도 밀어냈다.
1심(2017년)과 항소심(2018년) 재판부는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전 장관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업무(블랙리스트)를 실행한 혐의(직권남용) 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징역 3년을 받았다. 조윤선 전 수석은 1심에서 국회 위증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블랙리스트 작업에 일부 관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020년 대법원도 이들의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특검이 ‘범죄’로 분류한 행위 중, 문체부가 문화계 단체로부터 심사위원 명단을 받은 행위, 공모사업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행위 등 일상 업무와 가까운 일들까지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며 서울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파기환송).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2023년 10월 현재 2심 재판을 다시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작업의 줄기를 따라가면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이명박(MB) 정부다. 블랙리스트 사태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7월 구성돼 2018년 6월까지 활동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펴낸 백서를 보면, 위원회는 블랙리스트 작업의 출발점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작성된 한 문건을 지목한다. 2008년 8월27일 이명박 정부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이 만든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제목의 대외비 보고서다.
MB 정부 시절 작성된 대외비 문건
〈시사IN〉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 문건은 총 7쪽 분량이다. ‘①문화권력은 이념지향적 정치세력 ②좌파 세력의 문화권력화 실태 ③균형화 추진 전략 ④주요 대책(안) ⑤추진 체계 및 재원계획 ⑥향후 일정’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기춘 전 실장 특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작업과 판박이인 내용들이 2008년 문건에 적혀 있다. 두 정부에 걸쳐 기획되고 집행된 블랙리스트는 규모와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아이디어와 목적, 대안 및 후속 조치 모두 한줄기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림〉 참조).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을 보면, 이명박 정부 청와대는 ‘문화권력’을 ‘순수 예술활동이 아닌 문화를 수단으로 일정한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 지향적 세력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좌파’가 국민의식 개조 및 정권 유지를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문화를 조직적으로 활용한다고도 했다.
‘좌파 세력의 문화권력화 실태’라는 항목에서는 ‘좌파는 지난 10년간 정부의 조직적 지원하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중심으로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고 진단한다. ‘문화체육관광부→위원회 및 국립 문화기관→시민단체로 이어지는 조직구조를 정립시켜 예산, 사업 등 제도권의 수단을 통해 세력을 확대’했다거나, 예산 지원을 민간 좌파 인사들이 주도하려고 민간 중심 위원회(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영화진흥위원회)를 구성해 좌파 단체에 지원을 확대했다고 적었다.
봉준호·박찬욱 감독의 영화들도 언급돼 있다. 이들의 영화를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괴물〉)’ ‘북한을 동지로 묘사(〈공동경비구역 JSA〉)’ ‘국가권력의 몰인정성을 비판(〈효자동 이발사〉)’한 것으로 평가하며 ‘대중이 쉽게 접하고 무의식중에 좌파 메시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수단이 됐다’라고 썼다.
문건에서 제시한 균형화 추진 전략은 ‘단기간 좌파 척결을 위한 전쟁보다는 건전한 우파의 구심점을 신진 세력 중심으로 조직화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대안으로는 ‘△대부분의 문화예술인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점을 고려, 의도적으로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 △좌파 집단에 대한 인적 청산은 소리 없이 지속 실시 △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등 핵심 기관 내부 많은 수의 좌파 실무자들 청산 필요’ 등이었다.
실행계획은 명료했다. 좌편향 단체와 인사를 은밀하게 청산하고, 대기업을 동원해 우파를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우파 문화 실행 기관으로 ‘한국문화산업연구소’ 설립, 우파 문화 싱크탱크 ‘문화정책포럼’ 설립 △모금회 및 펀드 구성으로 건전 문화 세력(우파) 전폭적 자금 지원 및 좌파 자금줄 차단 △메이저 신문과 협력하여 좌파 행적을 밝히는 기획물 연재 △기업을 통한 자금조달 등이다.
문건에는 추진 체계로 청와대가 총괄기획을 맡고, 문체부와 기획재정부(기재부),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역할을 조정한다고 적혀 있다. 문체부는 산하기관 인적 청산, 새로운 구심세력 형성 지원, 과거 정부 지원사업 정밀 재검토, 투자 펀드 조성 등 역할을 맡기로 했다. 기재부는 문체부 예산을 정밀 검토해 좌파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우파 지원 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돈을 댈 기업들의 역할도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정부의 직접 지원은 최소화하면서 기부금, 후원금, 자체 투자 등의 형태로 돈을 받아 우파 중심의 문화예술 분야 건전화를 지원한다고 적혀 있다. 삼성·현대차·CJ·KT·SKT 등이 ‘협의할 기업’으로 문건에 언급됐다. ‘향후 일정’ 항목에는 ‘9월 대통령 보고’라는 계획이 담겨 있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는 뜻이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 적힌 내용은 상당 부분 실행됐다. 문건 작성 이후부터 1년 동안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 20여 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박명학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등은 해임됐다. 2009년에는 민예총 예산이 대폭 축소됐다. 2007년 대비 4분의 1 수준이었다. 다른 단체들은 ‘촛불시위 단체’라는 명목으로 문화예술단체 지원에서 배제됐다.
문체부 산하에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콘텐츠산업협회가 새롭게 출범했다. 조직기구로는 문화콘텐츠포럼, 문화콘텐츠산업연구소 등이 설립됐다. 한국문화콘텐츠산업협회는 이명박 정부 청와대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 작성 3개월 뒤인 2008년 11월28일 법인 등록했다. 문체부는 이들을 집중 지원했다. 방송통신위원회, 청와대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등 정부 부처도 후원하고 KT·SKT·포스코·한국전력 등 기업들이 협찬했다.
그 당시 국감에서 물으려 했으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는 구체적 명단 형태의 블랙리스트는 없다. 다만 박근혜 정부 시절 특검 수사와 재판, 지금까지 진행되는 블랙리스트 수사(문재인 정부 시절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등) 과정과 결과들을 종합하면, 블랙리스트 사태는 단순히 ‘명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견해에 따라 배제·감시·검열·차별·통제하는 모든 행위로 정의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는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을 통해 블랙리스트를 구조화했고, 개념과 전략, 기본 방향을 수립해 추진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백서에서, 이명박 정부 초기 블랙리스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유인촌 문체부 장관을 지목한다. 총 10권(본책 4권, 부록 6권)에 유 장관 이름만 총 104회 등장한다. 유 장관은 이명박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이었고, 최장수 장관 기록(3년)을 세우고 퇴임했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문체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유 장관이 이명박 정부 문체부 장관이던 시절, 소속 기관들에 대한 조직 장악, 문화예술 분야 공공기관 등을 관리감독할 수 있는 정책 구조와 조직문화를 새롭게 확립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사태와 달리, 이명박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의 수사와 재판 등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는 국정농단 의혹 수사를 위해 출범한 특검팀의 수사 범위가 아니었다.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개도개선위원회는 문체부 훈령에 따라 설치된 기구로 수사권을 갖지 못해 전말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 일부는 201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공개된 적 이 있다. 당시 야당(민주통합당, 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의원들이 문건을 강도 높게 문제 삼았다. 당시 예술의전당 이사장이던 유인촌 장관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문체부 장관 시절(이명박 정부) 작성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감 직전 유 장관이 예술의전당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사실이 10월8일 국정감사 당일 뒤늦게 알려졌다. 유 장관이 이사장직에서 사임한 시점은 2012년 9월24일. 여야가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 대한 질의를 위해 유 장관 증인 채택 여부 협상을 벌이던 때였다. 국회는 결국 유 장관에게 문건에 대해 묻지 못했다.
유인촌 장관이 문체부 장관이던 시절(2008년)에 해임된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박명학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곧바로 부당한 해임을 당했다며 해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는데, 전원이 승소했다(2009~2010년). 〈시사IN〉이 임종성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들의 소송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해임 당시 인사관리 규정상 명시된 징계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특히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의 해임 취소 판결문에는 “김 전 위원장이 문체부 직원에게 전화로 해임 통보를 받았고, 구체적인 처분 사유 등은 통지받지 못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2010년에는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을 작성한 부서에서 근무한 정인철 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SK로부터 문건에 우파 세력으로 언급된 ‘한국콘텐츠산업협회’ 후원금 수억 원을 받아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자진 사퇴했다. 다만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진상조사 결과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진흥위원회와 대기업 중심의 800억원 규모 우파 영화 제작 지원 펀드 조성 과정에서는 기업 총수가 구속돼 실형을 살기도 했다. 당시 SKT는 펀드 조성을 위해 미래저축은행에서 630억원의 차명 대출을 받아 ‘베넥스인베스트먼트’를 만들었는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 펀드를 조성하며 모은 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아 징역 4년이 확정됐다(2014년). 최 회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사면됐다.
유인촌 장관 지명 이후, 문화계는 둘로 쪼개졌다. 유 장관을 지지하는 쪽과 그를 ‘이념 기술자’라고 비판하며 임명을 반대하는 쪽이다. 2022년 풍자만화 ‘윤석열차’에 학생만화공모전 금상을 수여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논란이 되고, 이 기관의 2024년도 국고 보조금이 대폭 삭감된 상황에서 유 장관이 지명되자 불은 더욱 크게 번졌다.
유 장관을 지지하는 문화자유행동은 9월20일 성명을 내고 “문화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이념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는 이유로 집단적으로 억압하는 내로남불의 행태가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공공의 지원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선전선동하는 문화의 정치화가 아무런 문제인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문화연대 등으로 구성된 ‘유인촌 장관 내정 철회 예술인 모임’은 “유인촌 문체부 장관 내정은 ‘좌파 척결’을 외치며 일하던 그의 기술을 빌려 다시금 문화예술계를 이념 전쟁의 장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이념논쟁과 진보적 성향의 문화예술인 척결이라는 허황된 망상에서 깨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유인촌 장관은 인사청문회를 사흘 앞둔 10월2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서면질의 답변서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라며 관련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수사와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블랙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별도 수사나 조사가 불필요하다”라고 답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입장으로는 “블랙리스트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리스트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문체부의 역할은 창작자 보호와 자유로운 활동 지원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등이 제기한 해임 무효확인 소송에서 문체부가 패소한 일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는 “해당 기관장들은 기관 운영상 효율성이나 성과 측면에 한계가 있었고, 감사 결과 각종 규정 위반 등 사례가 발견돼 인사 조치했다. 소송 패소는 대부분 절차상 문제 등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국회 문체위 소속 임종성 의원은 “유인촌 장관은 ‘블랙리스트 사태’를 부인하고 있지만, 문화예술계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헌법과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고 모욕한 유 장관은 국무위원이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유인촌 장관 인사청문회를 마친 여야는 10월6일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에는 '부적격' 의견이 함께 기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다음날인 10월7일 유인촌 장관을 임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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