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소 전략 르포] ②“위스키 증류도 수소로” 英 그린수소 기업들 찾아가보니
英 정부 “수소 목표치 절반, 수전해로 충당”
“지원금, 블루 수소에 치중” 비난도
지난달 18일(이하 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중심가에서 차로 10분가량을 달리자 드넓은 평원 사이로 왕복 4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그렇게 5분여를 이동하니 최대 2층 높이의 주택 단지가 나타났다. 반듯하게 구획을 나눈 토지에 2~3가구가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는 붉은 적갈색과 회색 지붕을 한 건물이 번갈아 줄을 서 있었다. 도롯가에는 분양을 알리는 표지판이 즐비했다.
본래 이곳 인근에는 월리포드(Wallyford) 광산이 존재했다. 윌리포드 광산은 1880년대 중반부터 운영되다 1972년 문을 닫았다. 윌리포드 광산 폐광 이후 월리포드 일대는 쇠퇴했고, 지금은 한국으로 치면 위성도시를 만들어 사람들을 다시 끌어모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위성도시 인근에는 22개의 기업이 자리 잡고 있는 월리포드 산업 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날 월리포드 산업 단지를 찾은 건 스코틀랜드의 수전해(水電解·재생에너지를 통해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를 추출하는 것) 엔지니어링 업체인 로건 에너지(Logan Energy)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빌 아일랜드 로건 에너지 대표는 이날 오전 에든버러 신시가지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수소 및 연료 전지 협회 주최 행사에 참석한 기자를 자신의 차에 태워 로건 에너지 본사까지 바래다줬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손으로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다 1700년대 중반, 영국 사람들이 연료로 작동하는 기계로 물건을 만들며 산업화를 일으키면서 변화가 일었다. 하지만 기계는 움직일 때마다 이산화탄소를 방출했고, 이는 영국을 넘어 전 세계의 문제가 됐다. 영국 산업화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광산이 존재하던 곳 인근에 넷제로 시대를 이끌 수전해 업체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던 이유다.
◇ 수소로 위스키 증류…스코틀랜드 수전해 업체 ‘로건 에너지’
로건 에너지는 최대 50MW의 수전해 용량을 운영하는 직원 44명의 중소업체다. 수소 저장과 압축 장치 등을 타사에서 구입하는 대신 이를 조립하고 수전해가 이뤄지는 과정을 설계, 설치하는 엔지니어링 과정을 맡는다.
로건 에너지 본사 자체는 소박했다. 패널로 지은 듯한 단층 건물에 들어서자, 수전해 장치를 연결하는 각종 굵기와 길이의 파이프와 나사가 바닥에 쌓여있었다. 아일랜드 대표는 “공간이 협소해 로건 에너지를 소개하는 자리를 이렇게밖에 마련하지 못했다”며 의자 10여 개마다 형광색 안전 조끼가 놓여있는 5평 남짓한 공간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한편에는 따뜻한 물과 차,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쇼트브레드는 물론 영국인들이 차와 주로 즐겨먹는 스콘이 놓여있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곳으로부터 불과 1m 거리에는 수전해가 이뤄지는 3m가 넘어 보이는 높이의 장비가 세워져 있었다. 로건 에너지 본사 마당에는 선박 운송용으로 쓰이는 컨테이너와 유사한 크기의 철제 박스 안에 수전해가 이뤄지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이곳에서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해 저장하는 수전해 과정이 이뤄진다.
로건 에너지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제조업체인 아르비키 양조장(Arbikie Distillery)과 협력해 수전해 시설을 설치했다. 아르비키 양조장은 이를 통해 전 세계 양조장 중 최초로 수소로 위스키를 제조한다.
앞서 아르바키 양조장은 지난해 8월, 1MW급 풍력 터빈과 수전해, 수소 저장 장치 및 수소 보일러 시스템으로 구성된 그린 수소 에너지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다는 허가를 영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영국 정부가 2021년 11월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직후 주류 생산 업체가 화석 연료 대신 수소와 바이오가스를 사용하도록 약 1100만파운드(약 181억원)를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이후 로건 에너지는 아르바키 양조장 현장에서 물을 전기 분해해 그린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했다. 아르바키 양조장은 로건 에너지의 수전해 시설을 이용해 위스키 증류 공정 연료로 수소를 사용한다.
로건 에너지는 이외에도 2016년 7월부터 스코틀랜드 레벤머스 지역 현장에서 수전해를 하고 있으며, 독일·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수전해 서비스를 하고 있다. 아일랜드 대표는 “지난해 중국에 조인트벤처를 설립했고 오는 11월에는 한국에 사업차 갈 예정”이라며 한국 기업, 정부와의 협업을 기대했다.
◇ ITM 파워, 전 세계 수전해 프로젝트 중 최대 용량 담당
영국에는 100MW 수전해 시설을 설치할 역량을 갖춘 수전해 업체 ITM 파워(ITM Power)도 있다. ITM 파워는 2001년 설립돼, 수소 관련 기업 최초로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 그린 수소에 대한 관심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를 반영하듯 ITM 파워의 시장가치는 2020년 한 해 동안에만 6배 상승했다.
영국 중부 셰필드에 위치한 ITM 파워는 연간 1GW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지난 1월에는 100MW급 프로젝트도 따냈다. 독일 링겐(Lingen)에서 현지 전력회사 RWE가 운영하는 부지에 북해 해상풍력을 동력으로 한 100MW급 수전해 시설을 설치할 예정이다. 전 세계에서 실행 중인 수전해 프로젝트 중 최대 용량이다.
ITM 파워 본사는 지난달 21일 찾았다. 셰필드 중심가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ITM 파워 본사 역시 로건 에너지만큼 단출한 모습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수전해 업체라는 명성과는 달리 본사 건물은 약 5층 높이의 네모반듯한 건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건물 입구에서 방문객 등록을 마치고 들어선 1층 사무실에만 100여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1층 복도에는 지난 22년의 역사를 담은 사진도 붙어있었다.
제임스 콜린스 ITM 파워 기업 업무 책임자는 공장을 둘러보기에 앞서 투박한 작업화를 건넸다. 작업화를 신고 이 복도를 지나자 아파트 3~4층 층고, 족히 1000평이 넘어 보이는 공간에 수전해 설비가 빽빽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한쪽에 마련된 연구실 안에서는 물에서 분리된 수소가 흘러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콜린스 책임자는 “물 사이로 흘러가는 기다란 기포가 수소”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2MW부터 100MW를 초과하는 프로젝트까지 고객의 요구에 맞게 다양한 크기의 수전해 장치를 만든다”고 말했다. 2.5MW급 수전해 설비는 하루 동안 60MW의 전기를 이용해 1톤(t)의 수소를 생산할 수 있다.
ITM 파워는 영국의 대표적인 수소 프로젝트인 ‘기가스택’(Gigastack)에도 참여한 바 있다. 기가스택은 덴마크 에너지 기업 오스테드(Orsted), 미국의 다국적 에너지 회사 필립스 66(Phillips 66) 등이 2020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로 영국 최대 산업 단지인 험버 지역의 탈탄소화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ITM 파워는 5MW급 수전해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영국 사업·에너지·사업전략부(BEIS)는 저탄소 수소 공급 정책의 일환으로 기가스택에 750만파운드(약 124억원)를 투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영국 정부의 지원이 멈춰 기가스택 프로젝트는 중단된 상태다.
◇ 英 정부 “2030년까지 5GW 수전해로 충당”...업계 “그린 수소 지원 늘려야”
영국 정부는 2022년 2월, 2030년까지 연간 10GW의 전력을 수소로 충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중 절반인 5GW를 수전해 방식에서 얻겠다는 게 영국 정부의 구상이다. 태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이용해 물에서 수소를 분리해내는 수전해야말로 환경친화적인 수소를 생산해 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매년 영국 300만 가구가 소비하는 가스양과 맞먹는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21년 내놓은 ‘그린수소 생산비용 절감 전략’ 보고서에서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 이하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린 수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수전해 업체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뜻이다.
이에 영국 수전해 업계에선 정부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영국 정부는 2022년 4월, ‘에너지 안보 전략’을 발표하면서 2억4000만파운드(약 3962억원) 규모의 ‘넷제로 수소 펀드’(NZHF·Net Zero Hydrogen Fund)를 만들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블루 수소에 투자한 금액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영국에서 만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영국 정부는 블루 수소에만 200억파운드(약 33조14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했고, 대부분의 자금은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는 주요 석유 및 가스 업체에 전달됐다”며 “그린 수소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NZHF 자금이 2억4000만파운드라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라고 비판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매켄지에 따르면 전 세계 수전해 시장 규모는 2024년에 4억660만달러(약 5482억6000만원)로 확대되는 등 연평균 6%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李 ‘대권가도’ 최대 위기… 434억 반환시 黨도 존립 기로
- 정부효율부 구인 나선 머스크 “주 80시간 근무에 무보수, 초고지능이어야”
- TSMC, 美 공장 ‘미국인 차별’로 고소 당해… 가동 전부터 파열음
- [절세의神] 판례 바뀌어 ‘경정청구’했더니… 양도세 1.6억 돌려받았다
- 무비자에 급 높인 주한대사, 정상회담까지… 한국에 공들이는 中, 속내는
- 금투세 폐지시킨 개미들... “이번엔 민주당 지지해야겠다”는 이유는
- 5년 전 알테오젠이 맺은 계약 가치 알아봤다면… 지금 증권가는 바이오 공부 삼매경
- 반도체 업계, 트럼프 재집권에 中 ‘엑소더스’ 가속… 베트남에는 투자 러시
- [단독] 中企 수수료 더 받아 시정명령… 불복한 홈앤쇼핑, 과기부에 행정訴 패소
- 고려아연이 꺼낸 ‘소수주주 과반결의제’, 영풍·MBK 견제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