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대형 증권사에 '사전 유언장'이 필요한 이유

정병욱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2023. 10. 12.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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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 제도는 대형금융회사가 부실화될 상황에 대비해 질서정연한 정리가 가능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에 대형 증권사가 부실화되었을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대형 증권사에도 정상화·정리계획을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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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사진=본인제공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송강호는 아들에게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면서 "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계획이 대책일 리는 없다. 특히 금융시장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리먼 브라더스 등 대형금융회사의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와 복잡한 파생상품거래 등으로 촉발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 금융시장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계기로 국제기구인 금융안정위원회는 2011년 효과적으로 대형금융회사 부실을 정리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권고안의 핵심은 '사전유언장'으로도 불리는 정상화·정리계획(RRP) 제도다. 이 제도는 대형금융회사가 부실화될 상황에 대비해 질서정연한 정리가 가능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대형금융회사의 부실로 초래될 수 있는 실물경제 및 금융시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에 미국, 유럽 등 금융선진국은 대형은행과 대형투자회사에 대해 정상화·정리계획을 작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0년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지주회사 및 5대 은행을 대상으로 RRP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금융회사는 정상화계획을, 예금보험공사는 정리계획을 매년 수립하고 있다.

문제는 최근 금융시장의 위험요인을 고려할 때 은행보다 RRP제도 도입이 시급한 증권사에는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내 증권업은 경쟁력 강화 필요성에 따라 다수의 증권사가 대형화됐다. 발행어음 업무를 통해 은행의 예금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대규모 증권매입 등 자금공급 기능이 강화되면서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또 지난해 말 주가연계증권 등 파생결합증권, 환매조건부채권 규모는 각각 101조원, 128조원에 이르고 지속적인 증가세에 있어 위기 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아울러 9개 대형 증권사의 지난해 말 장외파생상품 계약금액은 약 1200조원에 달해 증권사 부실로 파생상품이 조기 종결된다면 금융시장 마비를 초래할 수 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 후 5주 내에 보유 파생계약의 약 80%인 73만건이 조기 종결돼 전 세계 금융시장의 붕괴를 가속한 사건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불거지고 있는 중국발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국내 자본시장에 일차적으로 그 충격이 전이될 수 있다.

이처럼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금융시장과의 연계성이 한층 높아져 예상치 못한 위기상황에서 자칫 시스템 리스크로도 번질 수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시카고대 다이아몬드 교수는 은행에 비해 규제가 느슨한 투자회사 등 비은행금융회사가 다음 위기의 근원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형 증권사가 부실화되었을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필요해 보인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또다시 사회적 혼란과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대형 증권사에도 정상화·정리계획을 도입해야 한다.

정병욱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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