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하프 코리안’....어머니 나라에서 우승하고 싶어요”
그는 하프 코리안(half-Korean)이다. 어머니가 한국계 입양아. 어머니 나라에서 열리는 테니스 대회에 우승컵을 들기 위해 왔다. 여자테니스 세계 4위 제시카 페굴라(29·미국) 이야기다.
지난 9일 개막한 여자 프로테니스(WTA) 코리아오픈. 그는 4년 만에 다시 참가했다. 4년 전엔 의욕과 달리 1회전 탈락했다. 이번엔 자존심 회복을 노린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계 입양아란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한국계’란 꼬리표는 숙명이다.
어머니 킴 페굴라(54)는 다섯 살이었던 1974년 미국으로 입양돼 뉴욕에서 자랐다. 한국어는 거의 못한다. 그러나 핏줄에 대한 애착이 있다. 2019년 코리아오픈에 제시카가 출전하면서 모녀 모두 한국 땅을 밟았다. 킴은 입양된 이래 귀향은 처음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입양기관을 찾아갔지만 소득은 없었어요. 다만 한국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가까워졌다고 느끼게 됐어요. 어머니 덕분에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도 응원 메시지를 많이 받고 있어요.”
4년 전과 달리 이번엔 어머니가 같이 오지 못했다. 든든한 후원자인 어머니는 작년 6월 제시카가 프랑스오픈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심정지로 쓰러진 뒤 몸이 불편하다. 뇌에 충격이 가 한동안 소통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제시카는 “다행히 호전됐다. (뇌 충격 때문에) 다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신체적으론 홀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며 “아직도 내 경기를 다 챙겨 보신다. 이번에도 함께 오고 싶어하셨다”고 전했다.
한국인 피가 흐르는 영향일까. 제시카는 불고기 비빔밥을 좋아한다. K팝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노래도 즐겨 듣는다. “한국 드라마도 보고 싶은데 뭐가 좋냐”고 묻기도 했다. ‘트렌디(trendy)’한 서울에 오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에 둘 다 뿌리가 있으니 언젠가 한국 어린이들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면서 두 나라를 잇는 가교 역할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테니스는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아버지 테리(72)는 천연가스 개발 등으로 재산이 67억달러(약 8조9600억원)에 달하는 거부. 미 프로스포츠 버펄로 빌스(미식축구)와 버펄로 세이버스(아이스하키) 등을 갖고 있다. 1남2녀 중 장녀로 부러운 게 없이 자랐다. 부모 모두 테니스를 즐겼지만 취미였다. 그런데 그가 7살 무렵 라켓을 잡은 뒤 “꽤 치는 걸?”이라는 탄성을 자아내는 재능을 보였다. 테니스 선수가 되겠다고 연습했지만 맘먹은 대로 풀리진 않았다. 부잣집 딸의 한가한 취미 정도로 취급받았다. 처음엔 신경 쓰였지만 이젠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비공식적으로 가장 부유한 테니스 선수’라는 주위 농담에도 “어쩔 수 없죠(it is what it is)”라고 웃어넘긴다.
2009년 프로 데뷔 후 초반기엔 부상까지 속을 썩였다. 2014년 무릎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른 뒤 내리막길을 걸어 단식 세계 랭킹이 775위까지 곤두박질쳤다. 2016년 165위까지 끌어올렸지만, 2017년 엉덩이 수술로 다시 632위가 됐다. 그러나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접을 순 없다”는 오기로 다시 라켓을 잡았다.
2020년 터진 코로나 사태는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코로나 시기 하루 공 1000개씩을 혼자 치면서 저를 몰아붙였어요. 다행히 몸 상태가 좋았고 이대로 사라질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진 뒤로는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죠. 결과를 위해선 과정이 달라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2019년 76위에서 2021년 18위로 상승했다. 그리고 2022년 4대 메이저 대회(호주·프랑스·US오픈과 윔블던) 바로 아래 등급에 해당하는 WTA 1000시리즈 멕시코 과달라하라 오픈에서 우승 감격을 맛봤다. 지난 8월엔 캐나다 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당시 “그동안 쏟아부은 모든 노력을 가치 있게 만들고 더 많은 우승을 꿈꾸게 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제 목표는 메이저 대회 우승. 아직은 8강이 최고 성적이지만, 지금처럼 기세를 이어간다면 곧 가능할 것으로 믿고 있다. 우선은 코리아오픈 다음 경기인 12일 애슐린 크루거(19·미국·80위)와의 16강전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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