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대선 D-10...“경제 망친 페로니스트는 안돼” 2野 지지자 결집

부에노스아이레스/서유근 특파원 2023. 10. 12.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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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근의 지구 반대편]
"인플레 더이상 못 견뎌" - 8일 저녁(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대선 후보 생방송 토론이 열린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법학부 건물 맞은편에서 시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폭죽을 쏘면서 지지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22일 열리는 아르헨티나 대선 레이스에서는 심각한 경제난으로 집권 좌파 정권의 인기가 추락한 상황에서 극우와 중도 우파 성향인 두 야권 후보가 각각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다. /서유근 특파원

지난 8일 오후 6시(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법학부 건물 맞은편 인도에 인파 수백명이 몰렸다. 국기를 흔드는 사람부터 타악기와 현수막을 든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3시간 뒤 법학부 대강당에서 열릴 대통령 선거 본선 전 마지막 생방송 TV 토론에 앞서 각 후보자를 응원하는 지지자들과, 각기 요구 사항을 주장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이날 군경을 법학부 건물 사방에 배치했다. 인근 도로 차량 통행을 전면 통제하고 지하철역을 폐쇄했다. 하지만 별도로 집회·시위 신청을 받거나 이를 제한하지는 않아, 10여 무리가 한 장소에서 각자 집회를 벌였다.

거대 정당이 주도하는 한국의 선거철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대형 무대, 음향 시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통일된 점퍼나 모자, 정당의 구호가 담긴 피켓들도 없다. 조직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다수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이나 평상복을 입었다. 각자 챙겨 나온 국기와 피켓을 흔들면서 응원가를 부르고, 북을 치고 폭죽을 쏘아 올리며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축구팀 응원전을 벌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부분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했다. 현장엔 후보 지지자 외 주거권 요구 단체, 원주민 단체 등과 지나가는 시민, 통제하는 경찰, 토론장으로 가는 정당 관계자, 취재진까지 수백명이 섞여 중구난방이었다. 그럼에도 집단 간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고 각자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차분히 토론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띈 무리는 중도 우파 성향 제1 야권 ‘변화를 위해 함께’의 대통령 후보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치안장관 지지자들이었다. 이날 가장 많은 약 100명의 지지자가 “불리치 대통령(Patricia presidente)”을 합창했다. 여성인 불리치 후보를 응원하는 중년 여성들이 중심이었다. 지난 8월 실시한 대선 예비선거(PASO)에서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하원의원이 후보로 나선 ‘자유의 진보’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이 당의 지지자들은 불리치 후보가 정권 교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가정주부인 마리아 로사는 기자에게 “지금껏 페로니스트(대중영합주의자)들과 싸워온 것은 불리치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업자 아나 엘레나는 “밀레이는 너무 극단적이고 정치 세력이 약해서 개혁하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리치는 노동, 복지 담당 장관 등을 두루 지낸 정치 경륜을 부각시키고 있다.

22일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에 나설 총 5명의 후보 중 주요 후보 3명. 왼쪽부터 좌파 집권 ‘조국을 위한 연합’ 소속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 중도 우파 야권 ‘변화를 위해 함께’ 소속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치안장관, 극우 야권 ‘자유의 진보’ 소속 하비에르 밀레이 하원 의원. /로이터 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평가를 받는 밀레이의 지지자는 비교적 적은 20여 명이 나왔다. ‘청년층이 밀레이 열풍을 주도한다’는 현지 언론의 분석처럼, 이날 지지자들은 전부 10·20대였다. 이들은 밀레이의 사진과 공약이 인쇄된 전단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나눠줬다. 대학생 지지자 알렉산데르 오르티스는 기자에게 “현재 여당과 제1야권 모두 구시대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일 뿐”이라고 했다. 또 다른 대학생 디에고 프란은 “’당신이 낸 세금을 남을 위해 복지로 퍼줄 필요가 없다’는 밀레이의 말에 매우 공감한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를 망쳐 놓은 현 정권은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했다. 경제학자 출신인 밀레이는 ‘미국 달러를 공식 통화로 채택하자’고 주장한다. 그가 지난 9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화폐) 페소는 X만도 못하다. 쓰레기라 비료로도 쓸 수 없다”고 하자, 페소화 가치가 전 거래일 대비 7.4% 급락했다.

이날 현 집권 세력이자 페로니스트인 ‘조국을 위한 연합’의 대선 후보로 나선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의 지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취재진 사이에선 ‘현 여당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란 반응이 나왔다. 방송사 엘누에베 소속의 한 기자는 “우리도 세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을 담으려고 현장에 나왔는데 마사 지지자가 전혀 없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고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진보 성향 일간지 클라린의 기자는 “마사는 인플레이션 등 각종 경제 실책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서 특히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라고 했고, 보수 일간 라나시온의 기자는 “그만큼 마사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현장 분위기가 반영하듯 대선 본선은 우파와 중도 표심이 누구에게 향할지가 관건이다. 각종 여론조사는 밀레이가 35% 내외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마사와 불리치가 각각 20% 중후반대 지지율로 2위 쟁탈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22일 열리는 아르헨티나 대선 본선은 1위가 45% 이상 득표하거나 40% 이상을 받고 2위와 1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리면 당선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1·2위가 다음 달 19일 결선투표를 통해 최종 승부를 가린다. 결선투표로 가면 밀레이가 어느 후보와 붙어도 이기고, 마사는 어느 후보와 붙어도 패한다는 예측이 나온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정권 교체 열망이 뜨거운 건 분명하다. 다만 예비선거 때 여론조사에서 3위로 예측된 밀레이가 깜짝 1위를 했던 전례가 있어 여론조사만 믿을 순 없는 상황이다. 이날 TV 토론은 밀레이에게 견제가 집중된 가운데 밀레이와 불리치 간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밀레이가 청년 시절 한때 좌파 게릴라 단체에 몸담았던 불리치의 행적을 두고 “테러리스트”라고 하자, 불리치는 밀레이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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