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규탄 놓고 미일중 ‘동상3몽’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3. 10. 12.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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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따져보며 주판알 굴리기
지난해 11월 인도에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국가 주석. /로이터 뉴스1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발발한 전쟁이 닷새째로 접어든 가운데, 주요 국가는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급속히 진영별로 세를 결집했던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한 중동 정세와 자국의 이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선을 1년여 앞둔 시점에 새로운 난제를 떠안은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우방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도 직접 개입을 피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이란을 상대한 역내 전쟁으로 빠져드는 일을 피하면서 이스라엘을 강력히 지원할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했다.

우방 지원 의지를 과시하되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고민은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소규모 특수부대를 파견하고 핵 항공모함 2척을 동시에 이스라엘 인근에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도, 이란을 직접적 배후로 지목하지는 않았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10일(현지 시각) MSNBC 인터뷰에서 “이란은 오랫동안 하마스와 역내 다른 테러 조직들을 지원해 왔지만, 이번 공격에 직접 연루됐다는 구체적 증거는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엔 이스라엘에 미군 지상군 병력을 보낼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런 행보는 중국과 경쟁하는 데 주력하며 다른 지역에서 국력 소모를 줄이려 애써 온 바이든 행정부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는 굴욕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취임 첫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고, 이듬해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군사는 끝내 파병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중동 내 반(反)이란 연대 구상의 하나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정상화 중재에 공을 들여왔다.

연방 하원 의장 공석이라는 복잡한 국내 상황도 신속하고 과감한 지원에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다만 민주·공화 양당 모두 신속한 지원에 동의하고 있어 임시 하원 의장 체제에서 예외적으로 지원 법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패트릭 매켄리 하원 의장 대행은 이날 “우리가 정부로서 행동을 해야 한다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미국의 국력이 분산되면서 미국 주도의 광범위한 경제·안보 압박에 직면해 있던 중국의 숨통이 다소 트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화권 언론들은 다음 달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의 샌프란시스코 정상 회의에서 예정된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이번 사태가 핵심 의제가 될 것으로 11일 전망했다.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양국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팔 휴전은 의견이 일치할 수 있는 이슈”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중국에는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어느 한편을 들어 적을 만들면 중동에서 어렵게 구축한 ‘중재자’ 지위를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3월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교 정상화를 중재했고, 6월과 9월에는 각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정상이 베이징을 찾았다. 사우디·이집트·이란 등은 지난 8월, 중국이 주도하는 브릭스 체제에 새로 합류하며 잠재적인 중국 우호 세력이 되고 있다. 차근차근 구축해 놓은 중동 중재자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은 당분간 어느 편도 대놓고 들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중국은 이번 무력 충돌로 사실상 완전히 용도 폐기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의 두 국가 해법(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청사진)을 따르기를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자이쥐안 중국 정부 중동 문제 특사는 10일 이집트 외교부 팔레스타인 사무 담당 차관보와 한 통화에서 즉각 휴전을 촉구하면서도 특정 국가 비판을 자제했다. 한편 중국 해군은 지난 9일에는 광저우에서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과 합동으로 하는 해상 훈련 ‘란젠(藍劍)-2023′을 시작했다. 중국은 이 훈련을 정례화해 중동 지역 영향력을 더욱 높일 방침이다.

각종 현안에서 미국 및 서방 진영과 찰떡 공조를 과시한 일본 역시 이번 사태에서도 양측 모두의 자제를 촉구하는 균형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 미국과 함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대러시아 관계에서 파열음을 낸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아사히신문은 이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각각 전화 협의를 조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한해서만 통치권을 확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이번 사태의 당사자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중동 국가들에 ‘일본은 이 문제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는 중립적 태도를 은연중에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기시다 총리는 앞선 8일 소셜미디어에 하마스의 민간인 살상에 대해서도 “죄 없는 일반 시민에게서 다수 피해가 나오는 데 대해 강력 비난한다”면서도 “가자 지구에서도 여러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하며, 모든 당사자가 최대한 자제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특히 하마스에 대해선 ‘테러 조직’이 아닌,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이라고 표현하면서 수위 조절에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일본의 행보 배경에는 원유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현실이 있다. 일본은 1990년 걸프 전쟁 때도 현장에 인력을 보내지 않고 총 130억달러 재정 지원만 하는 등 중동 문제에 유독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 맺은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에너지 안보의 핵심 파트너인 중동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실리 외교를 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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