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탈북민 600명 기습 북송
국군 포로 가족까지 포함된 듯
“여보, 몇 시간 후면 우리 모두 북송된다고 해요. 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이들을 잘 부탁해요.”
지난 9일 오후 3시쯤(현지 시각) 중국 지린성 훈춘 변방대 감옥에 수감됐던 탈북민 이순금(42)씨는 평소에 친분이 있는 공안의 휴대전화를 빌려 중국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시간은 2분이 채 안 됐다. 남편과 지인들이 손쓸 겨를도 없이 이씨는 3시간 만에 북송됐다.
11일 탈북민 구출 단체인 ‘자유의 빛’ 주옥경 대표에 따르면 함경도 출신 꽃제비였던 이씨는 1998년 탈북해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이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다 지난 6월 한국행에 나섰다가 중국-베트남 국경 인근에서 체포됐다. 주 대표는 “이씨는 한국에 가서 당당하게 살고 싶어 했지만,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결국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이 9일 밤 탈북민 약 600명을 전격 북송했다고 북한정의연대 등 북한 인권 운동 단체들과 여러 현지 소식통이 11일 전했다. 이들은 코로나 대유행 기간 한국행에 나섰다가 중국에서 잡혀 지린성과 랴오닝성 감옥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이다. 북송된 탈북민 가운데는 ‘국군 포로’ 가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중국 지린성 훈춘·투먼·장백·난핑과 랴오닝성 단둥 등 세관 5곳을 통해 비밀리에 동시다발로 북송당했다. 중국이 코로나 통제 해제 이후 소규모로 탈북민 북송을 진행한 정황은 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인원을 북송하기는 처음이라고 북한 인권 단체들은 전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항저우 아시안게임 직후 이런 사태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면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주옥경 대표는 본지 통화에서 “중국 공안 소식통한테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9일 저녁 6~8시쯤 어둠을 틈타 탈북민들을 트럭에 태워 군사작전 하듯 북송했다”며 “국경 봉쇄를 해제한 북·중 양측이 아시안게임 종료 직후 탈북민을 북송하기로 사전 합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현지 소식통은 “중국 당국은 보안을 위해 북송 몇 시간 전에야 수감된 탈북자들에게 이송 준비를 시켰다”며 “중국과 한국에 있는 가족·지인들이 미처 손쓸 새도 없었다”고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북한 보위부가 직접 중국으로 넘어가 탈북민 호송에 관여하고 지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북한 노동당 창립 78주년(10일) 전날 밤 탈북민을 대거 북송한 것은 북에 선물하는 성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엔과 북한 인권 단체들은 코로나 기간 체포돼 중국 전역의 감옥에 수감된 탈북민을 2000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코로나 봉쇄가 풀리면서 이들에 대한 북송 작업이 시작됐고 이번에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8월에 미국의 북한 인권 단체인 북한자유연합 수잰 숄티 대표가 “난민 버스 두 대가 단둥에서 신의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탈북민들의 소중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고 전한 바 있다.
탈북민들이 북송당하면 감옥이나 정치범 수용소로 갈 가능성이 높다. 북한정의연대는 “북한 당국은 탈북자들을 통해 외부 세계의 문물과 정보가 북한 주민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며 “이들 인권을 끔찍하게 유린할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유엔난민협약 제33조는 ‘체약국은 난민을… 그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이 협약 가입국이다. 중국이 1988년 가입한 고문방지협약 3조도 ‘어떤 국가도 고문받을 위험이 있는 다른 나라로 개인을 추방, 송환 또는 인도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강제 송환 금지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국제 협약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제 북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 단체들은 중국 정부에 탈북민 북송 중단을 촉구해왔다. 중국에 체포된 가족을 둔 탈북민들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게 강제 북송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중국에 구금된 딸(현미)을 둔 탈북민 박선영씨는 지난달 22일 서울 명동 중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내 딸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윤석열 정부는 탈북민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한국행을 희망하는 탈북민 모두 수용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고, 박진 외교부 장관도 탈북민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자유 의사에 반해 강제 북송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다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탈북민 북송을 막을 뾰족한 방법은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남은 탈북민 강제 북송을 막을 실질적 협상을 해야 한다.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을 압박해 이들을 처형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한중일 정상회담에 강제 북송 문제가 의제로 올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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