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김치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2023. 10.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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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넷째 이모가 김치를 또 보내왔다. 이번에는 파김치다. 지난달에 보낸 총각김치는 아직 절반도 먹지 못했다. 냉장고에 들어갈 곳이 없다. 친구들을 불러서 삼겹살을 구우며 한 번에 먹어치운다. 이틀 후, 어머니가 보낸 김치가 도착한다. 배추김치다. 이번엔 깍두기도 함께 온다. 김치 통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애초부터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김치 냉장고를 하나 더 사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스럽다. 또 친구들을 불러서 김치찌개와 김치 두루치기로 한 상을 거하게 차린다. 김치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이모에게 전화가 온다. 다음 주에 갓김치를 조금만 보내겠다고. 물론 전혀 조금이 아닐 것이며 김치 통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김치의 무한 경쟁은 1년 전 촉발되었다. 추석을 맞아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집에 놀러 오셨다.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온다며 두 분 모두 김치를 바리바리 싸오셨다. 우리는 좋은 술로 건배하며 갈비찜에 김치를 먹었다. 양쪽 김치를 번갈아 먹으니 양쪽의 기억이 번갈아 몰려왔다. 나는 어린 시절에 우리 집과 이모 집에서 번갈아가며 살았다. 그때마다 맛이 다른 김치를 먹어왔고, 맛의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예를 들어 이모의 김치는 마을 잔치였다. 시골집 마당에서 다른 이모들과 김장을 하며 보쌈을 삶았다. 마을 아이들과 군침을 흘리며 기웃거리면, 큼직한 배추김치에 보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었다. 마당 구석에선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사발째 꿀꺽꿀꺽 들이켠 뒤 갓 담근 김치를 와삭와삭 씹었다. 그 소리가 참 맛깔스러웠다. 어머니의 김치는 친구 잔치였다. 친구들을 우르르 데리고 집에 몰려오면,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워주기도 하고,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온갖 김치가 한가득 놓여있었다. 친구들이 서로 다른 김치를 먹을 때마다 들려오는 서로 다른 우걱우걱 소리가 참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이모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추억을 얘기했을 뿐인데, 두 분에게는 사명감이 생긴 것 같다. 그다음 주부터 두 분의 김치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응전한다. 과일을 보내고 영양제를 보내고 소고기를 보낸다. 그러나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는 선물을 보내지만 두 분은 정성을 보낸다. 미안해서 김치를 받을 때마다 재료비를 보내드리면, 그 재료비로 새로운 김치를 보내주신다. 나는 늘 김치 빚을 지고 있다. 그 덕분에 잔치는 계속된다. 김치 한 통이 도착할 때마다 잔치가 또 하나 생긴다. 김치 한 접시를 비울 때마다 추억도 한 접시 몰려온다. 두 분의 김치 덕분에 나는 점점 추억 부자가 되어간다.

며칠 전 어머니가 새로 담근 겉절이를 보내겠다고 연락했다. 힘드실 테니 그만 보내시라고 말씀드리면 언제나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제 담가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으니 더 부지런히 담그겠다는 것이다. 그 대답에 나는 늘 울컥해진다. 울컥하다는 핑계로 한밤중에 라면을 끓이고 김치를 꺼내서 허겁지겁 먹는다. 두 분의 김치 맛은 언제나 똑같이 편안하다. 그 편안한 맛이 오늘의 긴장을 풀어준다. 나는 혼자 라면을 먹고 있지만, 어느새 두 분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라면의 김 때문에 자꾸만 눈앞이 흐려진다. 아무래도 라면으로는 이 허기가 풀리지 않는다. 나도 두 분을 한 번쯤은 이겨야 배가 부를 듯하다. 김치로는 이길 수 없으니 다른 전략을 세워야겠다.

겨울이 오기 전에 두 분에게 긴 여행을 보내 드려야겠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내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자기 자신만 생각할 수 있도록. 여행 마지막 날에는 우리 집에서 만나야겠다. 수북이 쌓여 있는 비장 김치들을 탈탈 털어 잔칫상을 차려 놓아야겠다. 김치찌개, 김치볶음, 김치 두루치기, 김치전, 두부김치, 보쌈김치 등등, 김치로 할 수 있는 요리를 모조리 해서 두 분 앞에 차려 놓아야겠다. 내 요리 솜씨가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두 분의 김치 맛은 완벽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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