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추사의 난초 그림과 중용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등 고전의 핵심 4개로 압축
부남철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강의하고 있는 필자에게 단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어느 책을 읽어도 좋다고 말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중용을 권하고 싶지만 설명하기도 어렵고 난해한 책이기 때문에 망설이곤 한다.
지난 8월 28일, KBS의 오래된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2009년에 나왔던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의 난초 그림이 다시 소개되었다. 방송에서는 그 작품을 ‘불기심란(不欺心蘭)’이라고 했다. 모두 그 가격에 놀랐지만, 필자는 중용이라는 난해한 고전이 난초 그림에 담겨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림에 몇 줄로 간결하게 쓴 화제(畫題)에서 중용의 핵심을 그토록 알기 쉽게 요약한 추사의 학문에 더욱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는 논어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문장에서 의미를 취했다.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의리를 그려낸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세한도’를 그릴 때의 마음으로 추사는 유배지에서 난초 그림과 이를 설명하는 글로 중용의 주제인 군자의 도(道)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추사는 아들에게 난초를 그리는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주면서 중용의 핵심을 네 가지로 압축해서 알려주었다. 대학에서 나온 개념도 있지만 결국은 중용으로 수렴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마음의 자세를 말해주는 글이기도 하지만 또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다.
첫째, 추사는 난초를 그릴 때 불기심(不欺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불기심은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두운 방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에서 나온 개념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도 또한 불기심이라고 한다. 맡았다 하면 대부분 감옥에 가는 위태로운 중책을 맡았던 공직자가 무사히 직책을 마치면서 자기는 불기심을 가지고 일에 임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어떤 선비는 종이에 불기심을 써서 부적처럼 몸에 지니기도 했다. 불기심 세 글자만 지켜도 평생 처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은 자손에게 불기심을 가훈처럼 언급했다.
둘째, ‘내면으로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에 부끄러운 것이 없다(內省不疚).’ 혼자 있을 때 더욱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에 어떤 흠이 없게 하라는 말이다. 묵묵히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고 결국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 살펴도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남들의 비방이 결코 자신에게 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는 말이다.
셋째, ‘열 개의 눈이 보고 있고 열 개의 손이 지목하고 있다(十目所視 十手所指).’ 대학에 나오는 증자의 말이지만, 중용 제1장 ‘은밀한 데에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세한 데에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군자는 남이 보지 않을 때 더욱 조심한다는 말이다. 안 보는 것 같아도 자기의 모든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엄중한 경고인가?
넷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라(誠意正心).’ 이 역시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진실하다, 진심이다’는 의미의 성(誠)은 또한 중용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중용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9가지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다시 그것을 지인용(知仁勇) 세 가지로 요약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바로 성(誠)이다.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하여 그 구체적인 대응 방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진심으로 대한다면 결국은 잘 해낼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렇게 중용에서 고른 네 가지 당부는 난세를 살면서 수모와 치욕을 감내하며 끝내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준 말씀이니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내면의 공부를 강조하는 중용에서 인용한 이런 말씀은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도 소중한 가르침이다. 두꺼운 책으로도 해설하기 어려웠던 개념들이 아들이 선한 인격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과 높은 학문에 의해 다만 하나의 난초 그림으로 설명되었다. 이런 네 가지 핵심 개념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중용은 군자의 덕을 찬미하는 말로 끝난다. ‘속에 비단옷을 입고 겉에 거친 삼베옷을 걸친다.’ 이것은 인격을 수양한 군자의 은근하게 감추어진 덕을 표현한 문장이다. 추사는 난의 잎을 묽게 그리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 군자의 덕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것을 지탱하는 뿌리는 진하게 했다. 단색의 짙음과 옅음으로 중용의 정신을 그려낸 추사의 난초 그림을 한번 본 것만으로도 그 감동이 오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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