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102] 시처럼, 노래처럼
‘시는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읊조린 것’이라는 ‘서경(書經)’의 “시언지(詩言志) 가영언(歌永言)”은 시와 노래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광복 이전 대중가요 노랫말을 일컬어 ‘가요시’라 한 것은 작사가 대부분이 문인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동방의 태양을 쏘라’는 시와 ‘서울 노래’라는 유행가가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시와 유행가 부문에 모두 당선되면서 시인이자 작사가로 활동을 시작한 조명암이 대표적이다.
노래로 가장 많이 부른 시는 김소월의 작품이다. 대중가요로 만들기에 적합한 정형성과 우리 심금을 울리는 서정성이 주효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시 한 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성을 지닌 것도 한몫했으리라. 관련 연구에 따르면, ‘진달래꽃’ ‘개여울’ ‘부모’ 등 소월 시 59편이 대중가요로 불렸고 300명 넘는 가수가 노래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 서영은이 가장 많이 작곡했고 가수 최희준이 가장 많이 노래했다는 것도 눈에 띈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노래로 탄생한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1956년 명동의 한 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쓴 시에 이진섭이 곧바로 곡을 붙여 테너 임만섭이 그 자리에서 노래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직후 31세에 박인환이 사망한 일이 더해지면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그가 떠난 자리에는 그의 이름이 노래와 함께 남았다. 1956년 신신레코드에서 나애심의 목소리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현인, 최양숙, 현미, 조용필 등 유명 가수들이 거듭 노래했다. 특히 1976년에 박인희가 가을을 닮은 목소리로 노래하여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 밖에 1978년에 최헌 노래로 발매한 ‘순아’는 장만영의 시 ‘사랑’에 최주호가 곡을 붙인 것이고, 1980년에 ‘유심초’가 노래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모태로 한 것이다. 또한 1989년에 테너 박인수와 대중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불러 화제를 몰고 온 ‘향수’는 정지용의 시로 김희갑이 작곡한 노래다.
지난 4월에는 가수 윤하가 ‘한국어를 사랑하는 연예인’에 선정되었다. 우리말로만 창작한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큰 인기를 얻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모국어는 영혼의 창”이라는 말처럼, 일제강점기에도 지켜낸 우리말을 갈고 닦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울림 있는 우리말 노래가 한글 지킴이가 되리니, 더러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시가 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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