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 독립…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1894년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유교 성리학적 관념에 기초한 천하 질서에 조포(弔砲)를 쏘았다. 그 충격은 인도인들까지 동원한 영국군이 청군을 압도했던 아편전쟁(1840~1842) 때보다 컸다.
유교적 천하 질서는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약 1500만명)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 태평천국의 도전(1850~1864)도 이겨냈었다. 서양 열강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며 만민 평등을 내세운 태평천국 지도자 홍수전(洪秀全)보다 만주 황실을 지지했다. 유교 관념에 충실했던 이홍장 등 지방의 한인(漢人)들은 태평천국의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후 지속된 만한(滿漢) 갈등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패배의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만주 황실이 약화되면서 한인들에 의한 중화민국 건국이 앞당겨졌다.
청일전쟁은 조선의 내란과 외침이 중첩되어 폭발했다. 현재에도 한반도를 비롯한 북·남몽골, 신장 위구르, 서장 티베트, 인도차이나, 대만(중화민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등이 위험한 문명 충돌점들로 남아 있다.
동서양 문명, 조선에서 충돌
중국 공산당은 청일전쟁을 갑오중일전쟁이라고 부르면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중일전쟁과 연결시켜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인들이 건국한 대청제국과 한인들이 주도한 중화민국은 달랐다.
몇몇 일본 학자들은 이 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명칭은 청, 일은 빠지고 조선만이 문제였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보다는 차라리 조청일전쟁이라는 명칭이 낫다.
한국 교과서들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같은 시기의 청일전쟁을 압도하고 있다. ‘역사소설 동학사’(1940)에만 나오는 가상적 내용까지 포함해서 동학농민운동은 6쪽가량 차지하고 있지만 청일전쟁은 1쪽에도 못 미친다. 억울하게 죽은 동학 농민들의 해원(解冤)도 진실에 기초해야 가능하고, 이 땅에서 일어난 전쟁을 올바로 기억해야 전쟁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국제적 지지를 받았던 일본의 조선 독립론
1896년 런던에서 출판한 책에서 블라디미르라는 필명의 러시아 외교관은 청일전쟁을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단지 일본군이 더 서양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의용부대 회군(淮軍)을 조직해서 태평천국을 진압했던 이홍장도 서양 근대 문명을 배우려는 양무(洋務)운동에 열심이었다. 영국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청의 근대화를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열강들이 이홍장의 북양군만해도 약 35만명에 달했던 대청제국보다 총 병력 24만명의 일본을 지지했던 명분은 조선 독립이었다. 이미 조선과 평등하게 수교한 서양 열강은 청나라가 조선 지배를 강화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을 종료했던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는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했다. 조약문을 작성하면서 청나라는 미국 국무장관을 지냈던 존 포스터(John Foster,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한 존 포스터 덜레스의 외조부)에게 자문했다. 조선의 독립은 거부할 수 없는 세계사적 대세였다.
시대착오적이었던 청의 조선 속방론
1880년까지만 해도 이홍장은 “암암리에 조선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공공연하게 조선의 외교를 주관한다면 조선이 우리의 말을 꼭 듣는다는 보장도 없는 데다가, ‘세계의 모든 창끝’이 우리에게 향할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나라 군대는 1885년 천진조약으로 조선에서 철수했다. 굳이 군대가 주둔하지 않더라도 유교 성리학적 관념에 따른 자발적 속방으로 남으면 충분했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2)의 늑탈에 반발한 농민들의 봉기는 경상도에서 최제우(1824~1864 사형)가 창시했던 동학사상과 결합했다. 유교를 악용한 지배층이 농민을 착취하고, 동학을 탄압한 결과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민영준과 고종은 유교 성리학적 상국(上國)이었던 청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도 동학은 유교 성리학적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異端)이었다.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은 “속방 조선에 내란이 일어나 조선 왕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동원한다”고 일본에 알렸다. 조선을 속방으로 공표함으로써 청나라는 일본은 물론 “세계의 모든 창끝” 앞에 섰다.
자기모순에 빠진 일본과 대원군
1894년 6월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청군을 공격하기 앞서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적 지위를 주장하면서 경복궁을 점령한 것은 모순이었다.
일본은 고종의 생부 대원군을 복귀시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대일본 대조선 양국 맹약’을 체결했다. 외세를 배척하자고 했던 대원군이 외세와 협력한 것 역시 모순이었다. 그는 이제 조선 북부를 장악한 청군, 그리고 남쪽의 농민 봉기 지도자들과 내통했다. 며느리 민왕후를 폐하고, 총애하던 손자 이준용(고종의 조카)을 왕위에 앉히려고도 했다.
1894년 9월 16일 청군이 평양성에서 대패하고, 내통 사실이 밝혀지며 대원군은 다시 몰락했다. 고종의 관군은 일본군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다. 황해도의 안태훈, 안중근 부자 등을 포함한 지방의 유지들도 진압에 동참했다.
대한제국의 영광과 수치
1895년 1월 7일 고종은 1637년 청태종에게 항복했던 인조를 포함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홍범 14조를 맹세하여 고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제1조는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였다. 비록 일본의 승전에 편승한 것이었지만 독립은 가야 할 길이었다.
당시 일제가 조선의 독립을 끝까지 보장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세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으로 꺾였다. 대만은 계속 차지했지만 요동반도는 반환해야 했다. 과거 청나라에 의탁했던 고종과 민왕후는 이제 러시아에 의존했다. 일본군은 다시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왕후를 시해했다(을미사변, 대한제국 수립 후 명성황후 추증).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 돌아온 고종은 1897년 대한국 독립을 선포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일전쟁과 3국 간섭, 그리고 을미사변 이후 형성된 절묘한 국제적 세력균형 위에서 가까스로 이룩된 독립이었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독립문을 세우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은 영광이었지만,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승전, 그리고 국제적 간섭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수치였다. 민왕후도 대원군도 죽은 세상에서 고종은 1899년 대한국 국제를 선포했다. 러시아나 독일보다 더 권력이 집중된 과거 명나라와 흡사한 유일 황제 체제였다. 1644년 명나라 멸망 이후 지속되던 ‘조선=소중화’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권력을 독점한 황제는 결국 독립을 지키지 못했다.
美 선교사의 청일전쟁 분석한 책 읽고… 고종은 황제 정치, 이승만은 헌법 정치
청일전쟁 종전 1년 후 상해 영미 공공조계에서는 이 전쟁을 분석한 ‘中東戰紀本末(중동전기본말)’이 출판되었다. 고종은 이 책을 읽고 저자 림락지(林樂知)에게 감사의 선물도 보냈다.
림락지는 1860년 이후 청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 출신 선교사 영 알렌(Young J. Allen, 1836~1907)이었다. 그는 만주황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청나라 내부의 부조리에서 패전의 원인을 찾았다. 고종은 이 책을 읽고 감동했지만 만주황실처럼 독재의 길로 갔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고종의 전제정에 반대하다 감옥에 갇힌 25세 청년 이승만도 림락지의 책을 읽고 감동했다. 그는 1900년 옥중 동지들과 함께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고,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
이승만은 청일전쟁을 통해 “독립을 광포한 것이 진실로 일본의 영광이요, 대한에 수치”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의 힘으로 상투를 잘랐다고 해서 다시 상투를 틀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남의 힘으로 얻은 “내 나라 독립을 우리 손으로 빛내어” 보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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