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의 영화 같은 하루] [143] life doesn’t round out so well as detective fiction
“나, 에르퀼 푸아로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탐정일 겁니다(I, Hercule Poirot, am probably the greatest detective in the world).” 애거사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에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의 대사다. 이렇게 자기 지성을 절대적으로 자신하는 푸아로도 비합리적 존재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한 사건이 있다.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A Haunting in Venice∙2023∙사진)’은 그 사건이 등장하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수많은 살인 사건을 해결하며 인간의 추악한 면모에 지쳐버린 에르퀼 푸아로(케네스 브래너 분)는 탐정 일을 접고 베네치아에 은둔한다. 하지만 유명 탐정에게 은둔은 사치. 개인 경호원까지 고용해 온갖 의뢰를 물리치지만 결국 친분이 있던 추리소설 작가 아리아드네 올리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혼령이 등장한다는 교령회에 따라 나선다.
올리버는 레이놀즈(양자경 분)라는 심령술사가 여는 교령회에서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들이 벌어지자 푸아로라면 밝혀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를 부른 것이다. 교령회에 참가한 한 여성이 아리아드네를 알아보고 팬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세요. 작가님 작품은 악이 심판당한다는 믿음을 주거든요(You’re my favorite author. Your mysteries give me faith the wicked will meet justice).”
아리아드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답한다. “아쉽게도 삶은 추리극처럼 흘러가지 않죠(Sadly, life doesn’t round out so well as detective fiction).” 불길한 전조로 느껴지는 아리아드네의 말처럼 이 교령회를 둘러싼 악한 기운이 참석자들의 이성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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