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외환보유액 이렇게 허비해도 되나
680억달러 쏟아부어
달러 판 돈으로 세수 구멍 메우기
‘재정 분식’ 나쁜 선례 만들어
2004년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장. 야당 의원이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정부의 외환 투자 손실을 추궁했다. 부총리는 “비공개로 따로 설명해 드리겠다”며 진땀을 흘렸다. 얼마 뒤 정부가 수출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환율을 끌어 올리기 위해 역외 선물환에 손댔다가 2조원대 손실을 본 사실이 드러났다. 막대한 비용을 치렀음에도 환율은 오르기는커녕 1143원대(2004년 평균환율)에서 1024원대(2005년 평균환율)로 오히려 떨어졌다.
2008년엔 똑같은 시행착오가 정반대 모습으로 반복됐다. 정부가 고유가 충격을 줄인다며 환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달러 매도 개입에 나섰다. 그해 외환보유액이 610억달러나 줄 정도로 실탄을 쏟아부었지만, 환율은 2008년 1103원에서 2009년 1276원대로 뛰었다. 귀한 달러만 낭비한 꼴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정부의 외환 시장 개입은 1급 비밀 영역이었다. 언론이 설령 내용을 안다 해도 외부에 노출하면 국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보도를 자제했다. 하지만 2018년을 기점으로 금단의 영역 봉인이 풀렸다. 환율 조작을 의심하는 미국의 압박을 못 이겨 정부가 외환 시장 개입 내역을 분기별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2021년 상반기까진 별 움직임이 없다가 그해 하반기부터 강도 높은 시장 개입 징후가 나타났다. 미국의 공격적 금리 인상으로 미국과 한국의 기준 금리가 역전되고 환율이 1445원으로 치솟은 작년 2~3분기 중엔 330억달러를 팔아치워 달러 매도 개입이 절정에 달했다. 정부가 2021년 6월부터 올 6월 말까지 2년간 환율 방어에 쏟아 부은 달러가 680억달러에 이른다. 정부의 달러 매도 개입 탓에 지난해 외환보유액이 400억달러나 줄었다. 연 단위로 외환보유액이 크게 준 것은 1998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작년이 처음이다. 지난 8~9월 두 달 동안 외환보유액이 76억달러나 감소한 점을 보면 3분기 중에도 달러 대량 매도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금리 연 5%’가 만든 킹 달러 현상 탓에 달러 외 통화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건 세계 공통 현상이다. 최근 1년간 일본 엔화(-3.2%), 중국 위안화(-2.0%), 대만 달러(-1.5%)는 미 달러화 대비 가치가 떨어졌다. 반면 한국 원화는 5% 절상됐다. 나 홀로 원화 가치를 끌어 올리겠다고 달러 비상금을 소진하는 것이 올바른 정책인지 의문이다. 한미 간 금리 역전 폭이 더 커지고, 미국의 고금리가 장기화되면 환율 방어 노력 자체가 헛된 일이 될 수 있다. 현재 외환보유액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적정 수준에 미달하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외 채무는 6500억달러에 이른다. 기업의 달러 빚이 1550억달러에 달한다. 외환보유액을 마이너스 통장처럼 헐어 쓸 때가 아니다. 지금 같은 일방적 달러 매도 개입은 ‘비정상 원고(高)’로 간주돼, 환 투기 세력에 먹잇감을 제공하는 격이 될 수 있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상대에게 뻔히 읽히는 ‘수읽기’나 마찬가지다.
이번 환율 방어 국면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비정상은 정부가 외환보유액 달러를 판 돈으로 세수 구멍을 메운다는 것이다. 달러를 팔아 원화로 바꾼 자금이 외국환평형기금에 쌓였는데, 정부가 세수 부족분을 메우는 데 외평기금 20조원을 끌어다 쓰기로 한 것이다. 결국 달러 비상금을 털어 정부 지출에 쓰는 꼴이다. 일각에선 적자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세수 구멍을 메우는 ‘묘수’라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런가. 묘수라기보단 ‘재정 분식’에 가깝다. 환율 방어에 귀한 달러를 허비하고, 달러 판 돈으로 세수 구멍을 메우는 작금의 외환 정책은 재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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