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송중기는 왜 김치찌개가 아니라 생선찌개를 끓였나, 영화 ‘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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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 영화 어때’ 12번째 레터는 11일 개봉한 영화 ‘화란’입니다. 송중기씨가 출연해 화제가 된 작품이죠. 영화 보기 전, 제 머릿속 ‘송중기’는 ‘예쁘게 생긴 연예인’이었습니다.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레터를 쓰고 있다니. 변심했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는 정말 ‘배우’더군요.
‘화란’은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영화입니다. 잔인한 영화를 매우 싫어하는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터 소재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목부터 이중적입니다. 화란(和蘭)은 네덜란드이기도 하고(프랑스와 불란서, 이탈리아와 이태리처럼), 화란(禍亂), 즉 재앙과 난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럼 왜 네덜란드냐. 주인공의 이상향이 네덜란드입니다. 사실 꼭 네덜란드일 필욘없어요. 어딘가 멀리 있는 나라, 그곳에 가면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지명이면 됩니다. (이하 레터에 영화의 결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짱돌부터 갈깁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른 주인공이 어느 학생의 얼굴을 가격하죠. 주인공은 홍사빈. (극중 이름이 따로 있지만,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고유명사를 최소로 쓰는 제맘대로 원칙에 따라 실제 배우 이름으로 씁니다) 18세이고, 식당일 하는 엄마, 엄마가 재혼해 ‘아버지'가 된 남자, 그 남자가 데려온 배다른 여동생, 이렇게 셋이 함께 삽니다. 엄마의 재혼남은 술 마시고 몽둥이 휘두르는게 일상입니다. 홍사빈이 네덜란드를 꿈꾸게 되는 이유 중 하나죠. 첫 장면에서 짱돌 맞은 학생은 여동생을 괴롭히던 놈입니다. 폭행 합의금으로 돈이 필요해진 홍사빈. 중국집에서 알바하다 손님으로 온 송중기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송중기가 등장하는 장면. 귀가 매우 심하게 변형돼 있습니다. 조직의 큰형님이 벌줘서 그런가했어요. (송중기가 고리대금업, 오토바이 훔쳐다 되팔기 등을 전문으로 하는 지역 조폭의 중간보스거든요) 아니더군요. 그 망가진 귀는 송중기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송중기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취해서 정신놓고 있다가 아들이 물에 빠져 물고기밥이 될 뻔한 줄도 모릅니다. 그 아들, 어린 시절 송중기를 건져낸 건 어느 낚시꾼이었어요. 엄청난 대어를 잡은 줄 알고 힘줘서 끌어내보니 죽기 직전 송중기였습니다. 낚싯줄에 귀가 걸렸던 거죠. 그래서 귀가 그 모양으로 찢어졌습니다. 송중기는 이런 얘기를 조직에 들어온 홍사빈에게 들려줍니다. 빠져 죽을 뻔 했던 바로 그 물가에 서서 송중기는 말합니다. “그 때 이미 나는 죽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 송중기의 이후 시간은 아버지라는 상처를 향한 소리없는 울부짖음이었던 거죠.
송중기처럼 홍사빈도 얼굴에 흉이 생깁니다. 아버지 야구방망이를 피하려다 넘어져 눈가가 찢어졌습니다. 둘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사이가 됩니다. 홍사빈이 “저 모르시잖아요”라고 하니 송중기가 말하죠. “내가 왜 널 모르냐”.
둘을 결정적으로 묶어준 건 송중기의 한마디였습니다. “밥 먹었냐”. 그러면서 송중기가 끓여준 생선찌개를 먹습니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끓일 수 있는 김치찌개 아니고 손질하기도 불편한 생선찌개입니다. 송중기가 칼을 꺼내 생선을 직접 손질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생선은 아버지한테 버림 받아 물에 빠져 죽어버린 송중기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거든요. 그 이후 송중기의 삶은 그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과 같이 굴러온 시간인 거죠. ‘생선=죽음’은 영화 ‘대부’를 비롯해서 미드 ‘소프라노스’(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입니다) 같은 마피아 영화에 자주 나오는 비유이기도 한데 그건 다음에.
둘은 찌개를 같이 숟가락 넣어 떠먹습니다. 둘의 마음도 그렇게 묶여집니다. 제가 영화 ‘1947 보스톤’이 나태했다고 본 것도 이런 점입니다. 인물은 필요없고 ‘닥치고 결승전’ 분위기로 몰아가서 우승의 감격을 보여주는데에만 주력하는데, 우승하는 거야 원래 알고 있는 거고요. 이기는 사람한테 맘이 가야 하는데, ‘보스톤’은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국가가 이겼으니 기뻐져야 한다는 건데, 영화가 올림픽 중계던가요.
찌개 장면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홍사빈이 송중기를 죽이고 소년에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겠구나’. 네, 그대로 됩니다. 왜냐면 송중기가 홍사빈의 유사 아버지로 작동하는 전형적인 살부(殺父) 서사로 보였거든요. 아버지로부터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한 아들의 살부, 특히 서구 고전문학에서 흔히 반복되는 살부 서사는 한국 영화에서도 변형돼 나옵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로 나오고, 하정우는 아예 살부계를 조직합니다. 물론 이때는 그 아버지들이 친일파라는 논리를 대긴 하죠. 친일이든 뭐든 뭔가를 청산하기 위해선 아버지가 죽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선 홍사빈이 태어나 살아온 시간, 살아온 공간까지 포함되겠네요.
결말이 예상가능했다고 해서 별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로맨틱 코미디를 반전을 위해 보지 않듯이, 원형(原型)적 플롯을 어떻게 변주해 보여주느냐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는 거니까요. 결말에 이르면 홍사빈이 송중기를 다시 찾아가기 전에 여동생에게 말하죠. “괜찮아, 별일 없을거야.” 제가 전에 레터에서도 말씀드렸죠. 결말에서 “괜찮아”라는 대사 나오면 반드시 ‘안 괜찮은’ 일이 벌어진다고요. 이 영화도 어김없습니다. 아주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송중기의 죽음은 자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 예전에 죽었고, 남은 자신은 유사 아들을 위해 죽습니다. 홍사빈이 조직을 떠나기 위해선 송중기를 죽였다는 걸로 알려져야 하니까요.
홍사빈은 집으로 와서 아버지가 엄마를 방망이로 때려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피묻은 방망이를 집어들고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홍사빈. 아버지를 때려죽일까요. 아뇨. 왜냐면 진짜 아버지, ‘밥 먹었냐’고 물어봐주던 그 아버지는 이미 죽였으니까요.
마지막 장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남매. 네덜란드로 가는 걸까요. 글쎄요. 조직의 큰형님이 송중기의 시체를 처리하다 “그 놈 찾아와” 한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유사 아버지 송중기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사 아들 홍사빈에게 주려 했던 구원이야말로 영원히 갈 수 없는 화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란’은 배우들이 골고루 호연을 보여줬습니다. 송중기씨는 물론이고, 장편영화 첫 작품인 홍사빈씨도요. 나를 때릴지 안 때릴지 모르겠는 폭력 아버지의 양가적 얼굴을 잘 표현한 유성주씨도 인상깊었습니다.
그럼, 기자는 변심하고, 송중기는 변신한 영화 ‘화란’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잔인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적극 추천했을텐데. 흠. 잔인한 장면을 견디는데 문제가 없고, 해석 텍스트로 영화를 즐기신다면 보실 만합니다. 오늘은 쓰다 보니 좀 길어졌네요. 다음엔 더 가뿐하게 보낼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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