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의존과 돌봄은 ‘쓴맛’
최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열린 비판적섬연구학회에 참석했다. 비판적섬연구는 북반구 대륙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남반구 군도의 관점을 세계 인식과 사회 분석에 가져오고자 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여기서 ‘북반구(Global North)’와 ‘남반구(Global South)’는 기존의 ‘1세계’와 ‘3세계’라는 말을 대체해 사용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용어다. 처음 1세계, 2세계, 3세계 구분이 등장한 건 냉전시대였다.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1세계’, 동구 공산주의 진영을 ‘2세계’, 이에 속하지 않는 여타의 국가들을 ‘3세계’로 묶었다. 동구권 붕괴 후 2세계란 말은 사어가 되었고, 1세계, 3세계는 각각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3세계 국가들은 대체로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터라 오랜 시간 저개발 상태에 머물렀다. ‘저개발’은 결국 타인을 착취해 배를 불려온 제국주의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 묘사이자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문화적 낙인이었다. ‘북반구/남반구’는 ‘1세계/3세계’란 표현이 숫자를 통해 이미 설정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계를 비판하고 과연 북반구가 주도한 ‘개발’이 다양한 생명을 위한 것이었는지 급진적으로 질문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꽤 실용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으론 3세계에 속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그 위상에서도 확실히 북반구가 되었다. 예컨대 2020년 기준 국가별 탄소배출량 8위, 2022년 기준 8대 무기 수출국이자 10대 무기 수입국에 이름을 올린 한국은 세계를 파괴하는 데 있어 가장 앞서 나가는 국가(선진국)이다. 비판적섬연구학회에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이 모여 자연/문명, 동물/인간, 여성/남성 등 각종 이분법을 넘어 착취가 아닌 공존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대안적인 존재론을 탐색했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문화비평에 ‘의존비판’이 필요하다는 주제로 발표했다.
페미니스트 장애학 이론가인 에바 페더 키테이는 “사회를 평등한 사람들의 결사체로 바라보는 시각은 의존, 즉 유아, 아이, 노인, 병약자, 장애인과 같은 공평할 수 없는 의존성을 외면한다”고 말하고, 이런 ‘생산성과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이란 신화에 대한 분석적 작업을 ‘의존(관점에서 평등)비판’이라 불렀다. 나는 이를 문화비평으로 전유해 ‘의존과 돌봄’의 관점에서 문화 텍스트를 살피면 가려진 많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영화 <퍼펙트 케어>(2021)는 일견 성공을 위해 내달리는 알파걸과 효자 사이의 쫄깃한 한판 승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봄의 관점에서 보면, 돌봄을 하찮은 일로, 의존하는 자를 짐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등장한 돌봄공백에 틈입해 돌봄을 완전히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을 착취하는 비정한 자본을 고발하는 영화가 된다.
이런 시대에 돌봄이란 돈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값비싼 재화로 전락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미국 후견인제도의 허점 속에서 등장한 사기사건 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2023 와우북페스티벌’에 참석한 다와다 요코 작가는 “밥을 하는 사람 덕분에 내가 존재한다. 야채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그렇게 모두가 존재해야 나도 존재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공존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고립시키고 위축시키는 게 아니라 그 관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세계와 연결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 안에서 돌봄과 의존, 공존, 그리고 이야기가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공존은 달콤하지 않다. 공존은 돌봄과 의존만큼이나 쓰다. 하지만 그 쓴맛 덕분에 우리가 산다. ‘의존비판’을 제안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의 또 다른 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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