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은행나무 사랑
은행나무는 2억년 넘게 세대를 이어온 나무종이래. 바퀴벌레만큼 똑똑하고 끈질긴가 봐. 열매는 냄새가 고약해서 짐승이나 배고픈 새들도 거들떠보지 않아. 그런 생존 전략은 여타 나무들과 딴판으로 달라. 강력한 야성으로 독자 생존. 손이 꽁꽁꽁, 빙하기에도 살아남았어.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괴테는 젊은 여인 마리아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끝이 갈라진 것처럼 보일 뿐 반듯한 한 장 은행나무 잎사귀를 편지에 동봉해요. 나는 당신과 이처럼 둘이 아닌 한 몸임을 느껴요.”
마치 식물학자의 글 같은 사랑 고백. 결국 사랑은 이루어져 연인으로 발전했다지. 은행나무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 듯 사랑이 물들고, 가슴도 활활 뜨거워지는, 가을이야 가을.
한 수입배급사에서 <이터널 메모리>란 칠레 다큐 영화에 대해 관객과 이야길 나눠 달라 부탁을 받았다.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노래 ‘멜랑콜리아’가 구슬프게 흐르는 영화는 문화부 장관을 지낸 배우 출신 여인과 피노체트 군부에 저항한 지식인이자 언론인 남자 친구가 주인공. 둘의 지순한 사랑에 알츠하이머병이 덮치는데, 죽음을 앞두고 둘은 결혼 행진.
칠레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무려 5000살이 넘었다고 해. ‘파타고니안 사이프러스’란 종의 나무, 별명이 ‘증조할아버지’라던가. 할머니는 어딜 가고 할아버지 혼자서 수천년을 견디며 살았을꼬. 언제고 다시 칠레에 가면 그 증조할아버지를 뵐란다. 우리 동네 당산나무에다 막걸리를 대접하듯 말술을 따라드리고 싶어라.
공룡시대에도 살았을 은행나무, 아기공룡 둘리가 다닌 고등학교는 요리보고, 둘리가 사는 지방은 저리봐도, 새로 전학 간 학교는 빙하타고, 좋아하는 음식은 일억년전. 둘리 시대의 아재 개그야. 공룡이 살던 때부터 지금껏 이파리를 돋우며 살아온 은행나무.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은 엄마가 명절 때 부친 ‘전’ 같아. 일억년~ 우리 오래오래 변치 말고 사랑하자.
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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