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헐크’ 이만수가 사는 법

차준철 기자 2023. 10. 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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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야구 대표 선수들이 지난달 27일 싱가포르전 승리 후 이만수 전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이만수 전 감독 제공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엎치락뒤치락, 3-4로 뒤지다 용케 5점을 뽑아 8-4로 뒤집었지만 이내 8-7로 쫓겼다. 주자를 내보내기만 하면 점수를 주니 심장이 떨려 경기를 지켜보기 어려웠다. 상대의 9회초 공격, 마지막 타자가 내야 땅볼로 잡히는 순간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선수들과 함께 뒹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았다. 선수들이 달려와 헹가래를 쳐줬다. 공중에 세 번 뜨면서 지난 10년의 시간이 짧은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한 ‘헐크’ 이만수 전 감독(65)이 추석 연휴 첫날 아침에 전한 이야기다. 나라에 딱 한 팀뿐이라 그대로 국가대표인 라오스 야구팀이 지난달 27일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싱가포르를 꺾고 국제대회 첫 승을 올렸다는 소식이다. 스태프 총괄책임자로 라오스 팀과 함께한 그는 기적 같은 승리 후 한참 울었다고 했다. 선수 때 타격 3관왕을 하고도, 코치 시절 미국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도 울지 않은 그였다.

배드민턴 천재 안세영의 부상 투혼, 탁구 신동 신유빈의 발랄한 도전, 수영·양궁 3관왕 김우민과 임시현…. 당찬 패기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쿨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 성과를 일군 한국 선수들의 명장면이 이번에도 많이 나왔다. 칭찬이 아깝지 않다. 더불어 이번 아시안게임은, 개인적으로는, 라오스 야구의 승리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역사적인 첫 승을 이루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이 전 감독으로부터 익히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우연찮게 라오스 야구 보급을 요청받은 헐크는 그 이듬해 프로야구 SK 감독을 그만두자마자 라오스로 떠났다. 야구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나라, 땡볕 아래 호기심에 야구 하겠다고 나온 아이들의 절반은 맨발. 이런 곳에서 헐크의 야구가 새로 시작됐다. 지금껏 해마다 몇 차례씩 라오스에 가서 야구를 가르쳤고 사비를 털거나 후원을 받아 장비와 용품을 지원했다. 연습 또 연습으로 더디게 실력을 쌓아갔는데, 기껏 키운 선수들이 스무 살 넘으면 밥벌이하느라 야구를 그만두는 게 답답한 문제였다. 그래서 라오스 선수들은 어리고 작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라오스는 태국과 스리랑카에 대패하고 10개국 중 꼴찌를 했다. 5년 만에 맞이한 항저우 대회에서 절치부심 1승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출발부터 꼬였다. 태국·싱가포르와 예선리그를 벌여 1승을 거두고 2위 안에 들어야 본선에 오르는데 라오스 당국이 본선 체류비용을 책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헐크는 “내가 빤쓰를 팔아서라도 보내줄 테니 걱정 말고 1승부터 하라”고 말했다. 구성원들을 믿고,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리더의 면모다. 라오스의 본선 숙식비는 이런 얘기를 접한 세계야구연맹이 모두 댔다고 한다.

헐크 리더십의 또 다른 요소는 구성원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라오스는 본선에 올라 5경기를 더 했는데, 중국·일본·필리핀·태국·홍콩에 단 1점도 못 내고 모두 영패했다. 돈이 없어 18명만으로 선수단을 꾸렸는데 그중 셋은 광대뼈에 금이 가고, 손톱이 반으로 갈라지고, 턱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뛴 결과다. 그래도 선수들은 자신감과 ‘수수’를 얻었다. ‘수수’는 ‘파이팅’을 뜻하는 라오스 말이다. “두렵다”며 겁부터 먹었던 라오스 선수들이 “더 열심히 하면 붙어볼 만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감독은 “경기를 할수록 선수들 실력이 늘어나는 게 보이더라”고 했다.

헐크는 금메달보다 값진 이번 첫 승과 함께 얻은 귀중한 수확이 있다고 했다. 평소 선수들에게 “꿈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한 말이 맞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이란다. 하루 세끼 밥 먹는 게 꿈이라던 젊은이들에게 야구로 희망을 안겨준 그는 다음 목표인 아시안게임 본선 첫 승리를 향해 또 함께 달리기로 약속했다.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도전하면 언젠가는 문이 열린다는 확고한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헐크 리더십의 핵심이다. 그는 또 10년 후 라오스 야구가 한국·일본과 대등하게 맞설 날을 그리며 “야구를 가장 잘한다고 생각할 때 더 갈고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야구 변방국 라오스의 첫 승이 먼발치의 소소한 사연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선수들의 피·땀·눈물과 더불어 한 지도자의 열정과 헌신이 배어 있어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성원을 믿고 감싸며 성장시키고,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해 더 멀리 보는 비전을 내놓고,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 크고 작은 조직뿐 아니라 사회와 나라의 리더라면 새삼 곱씹어야 할 덕목이다.

차준철 논설위원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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