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슬픔의 총량
남쪽 하늘 천칭자리의 글리제 581 항성을 공전하는 글리제 581d 행성에서 피지배 종족인 글리제 581d-Ⅱ족이 봉기를 일으켜 글리제 581d-I족 아녀자를 인질로 잡고 대치 중이다. 한편 직녀성이 있는 거문고자리에서는 케플러 438 항성을 공전하는 케플러 438b 행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케플러 438b-IV족 수천 명이 사망하고 지금도 수만 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에서 수많은 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고 그 뉴스가 보이저 34호 탐사선을 통해 인류에게 실시간으로 보도된다.
‘공감의 원’은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자신만 아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던 우리는 개인의 일생과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가족, 부족,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공감의 원을 넓혀왔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아닌 동물의 고통까지도 외면하지 못하여 윤리적 채식, 공장식 축산 반대, 생태계 보전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공감의 원이 지구 안에서 점점 넓어졌다면, 우주 관측 기술이 발전하고 드레이크 방정식 등을 통해 외계 생명체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머지않아 공감의 원이 지구 바깥으로 확장될지도 모른다. 공감의 원이 무한히 넓어진다면 우리는 온 우주의 뭇 존재와 아픔을 나누는 초공감능력자가 될까? 그는 우리가 아는 신과 비슷하려나?
온종일 8평 작업실에 틀어박혀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는 내게도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의 온갖 뉴스가 쏟아져 들어온다. 대부분 읽기 괴로운 소식들이다. 누구도 내게 작업실을 넘어서서 지구상의 온갖 존재들에게 공감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 기어코 나의 작은 고뇌를 더하고 마는 것일까?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역시나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속담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슬픔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어서 10가지 고통에 대해 슬퍼하다가 100가지 고통에 대해 슬퍼하면 고통 하나하나에 대한 슬픔이 10분의 1로 줄어든다. 이따금 신이 무정한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무한한 피조물에게 정을 고루 나눠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고통에 집중된 슬픔은 우리의 작은 가슴에 담기지 않는다. 억지로 욱여넣으려다가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이다. 이 거대한 슬픔은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켜 일상을 파괴한다. 타인의 고통이든 자신의 고통이든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 비하면 일상을 영위하는 일은 너무도 무가치해 보인다.
에드거 앨런 포는 아내 버지니아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악이 들끓는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쓰다 우주적 해답을 얻었다. 포의 마지막 작품 <유레카>에 담긴 그 깨달음은 우주가 파괴와 재창조를 끝없이 겪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태초의 순간에 삼라만상이 하나의 존재로 통일되고 그 존재는 무수히 갈라지며 자신(신!)의 작디작은 조각을 간직한다. 내게도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날 우주적 해답이 필요하다. 인류가 탐사선을 두 척이나 태양계 밖으로 보냈으니 언젠가 우리는 무한한 고통에 슬픔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처럼 무정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승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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