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크바·포그롬 떠올라'…울부짖는 이·팔 민간인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조부모 시절 포그롬(유대인 학살)과 유사하다."
"할아버지에게 들은 나크바(대재앙·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팔레스타인인 집단 실향)에 대해 어제 완전히 이해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제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공격과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보복 공습이 이어지며 이스라엘 및 가자지구 사람들은 지금의 분쟁에서 이들 민족이 겪은 최악의 재앙을 떠올렸다. 이스라엘이 지상 공격을 예고한 가운데 민간인 피해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영국 BBC 방송은 10일(현지시각) 오전까지 전투가 지속된 이스라엘 남부 크파르 아자 마을에서 지난 7일 하마스 습격으로 살해된 민간인 주검 수습이 이날에야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전투 뒤 이날 종일 주검을 수습한 이스라엘군 낙하산 부대 부사령관 다비디 벤 시온은 방송에 희생자들 일부는 목이 잘려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하마스가 어린아이를 포함해 "무기가 없는 그저 평범한, 아침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 시민들을 죽였다"며 분개했다. 이 마을에서만 수십~수백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7일 하마스 무장 세력이 가자지구 인근 이스라엘 남부 20곳 이상의 장소를 급습해 민간인을 포함해 1200명 가량 죽고 150명 가량을 납치됐다. 사망자 다수가 민간인이다.
이스라엘 구조대원과 생존자 증언 및 확인된 영상을 종합한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인근 비에리 마을에서도 어린이를 포함해 100명 이상의 주검이 수습됐다. 당시 상황이 촬영된 영상 중 하나엔 인질로 잡혔던 이스라엘인 여러 명이 이후 사망해 길에 쓰러져 있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다.
100명 이상이 살해된 노바 페스티벌 현장에선 하마스 무장대원이 이스라엘 여성을 오토바이에 태워 납치하는 동안 그의 연인이 팔이 꺾인 채 절규하는 영상이 찍혔다. 크파르 아자르 마을 북쪽에 위치한 도시 스데로트에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 7명을 포함해 적어도 2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크파르 아자 마을에서 이스라엘군 사령관인 이타이 베루브 소장은 "이건 전쟁이나 전장이 아닌 학살"이라며 "내 평생 처음 보는 일로 우리 조부모 시대의 포그롬과 더 유사하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뚫려 민간인 살해로 이어진 참변에 이스라엘 주민들 사이에선 국가에 대한 불신, 버림 받았다는 참담함이 팽배해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크파르 아자르 급수탑에 "부끄러운 줄 알라"고 적힌 반정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 보도했다.
가자지구 "물·식량보다 안전 지대 절실…즉각 휴전 필요"
하마스 공격 이후 이스라엘의 무차별 보복 공습 아래 놓인 200만 명 이상의 가자지구 주민들은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가 막히며 사실상 이 지역에 갇힌 채 폭격을 견디고 있다. 공습 시작 이후 950명 이상이 죽고 5000명이 다쳤다. 이스라엘 쪽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향하는 유일한 보행자 통로인 에레즈를 폐쇄했고 이집트로 향하는 통로인 라파에도 폭격을 가했다.
10일 <로이터> 통신은 공습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가 다시 온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폭격을 피해 이틀 동안 세 번이나 대피한 22살 가자지구 주민 플레스티아 알라카드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1948년 나크바에 대해 듣긴 했지만 이해하진 못했다. 어제 나크바를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거주 중이던 아파트가 폭격 당한 뒤 친구 집으로 피신했지만 곧 그 집도 공격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잠시 병원으로 피해 있다가 또 다른 피난처로 향하던 참이었다.
또 다른 주민인 라드완 아부 알카스는 거주하던 가자지구 알 리말에 위치한 5층 짜리 주택이 9일 폭격을 맞아 파괴돼 가족들과 친구 집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복싱 강사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더 심한 폭격을 당할까봐 두렵다며 통신에 "이건 우리의 1948년이다. 또 다른 나크바"라고 말했다.
가자지구 언론인인 하산 자바르는 <AP> 통신에 "지금 가자지구에 안전한 곳은 없다"며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말했다. 언론인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가자지구 공습으로 10일까지 최소 7명의 언론인이 사망하고 2명이 실종됐다.
<뉴욕타임스>는 가자지구 보건당국과 주민들을 인용해 이번 공습 시작부터 이스라엘 쪽이 학교, 병원, 모스크 등을 무차별적으로 타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공습 시작 뒤 병원 7곳, 학교 48곳을 포함해 168곳의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쪽의 공습 및 대피 경고도 이전만큼 구체적으로 발령되지 않아 주민들은 집에서 폭격 당해 죽음을 맞았다. 이스라엘 쪽은 하마스가 집, 학교, 병원 등에 숨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연계된 모든 곳을 타격하겠다고 밝혔다. 하마스 대원 또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으로 공동체에 섞여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할 것을 예고해 민간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우려된다. 10일 <로이터>에 따르면 갈란트 장관은 "우리는 공중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이후 지상에서도 공세를 펼칠 것"이라며 "공세를 계속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사상 최대 수준인 36만 명의 예비군을 동원한 상태다.
전날 이스라엘의 연료, 식량 차단을 포함한 가자지구 전면 봉쇄로 민간인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봉쇄 해제보다 당장 폭탄을 피할 안전지대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나온다. 가자지구 주민이자 정치분석가 음카이마르 아부사다는 <워싱턴포스트>(WP)에 "필요한 것은 안전한 통로, 인도주의적 통로"라며 "하루 또는 두 시간, 여섯 시간이라도 즉각적 휴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기와 연료 없이도, 부족한 식량으로도 살 수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안전 지대"라고 호소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0일 연설에서 하마스의 행위를 "완전한 악"이라고 표현하며 "이스라엘은 이런 악랄한 공격에 대응할 권리가 있다"고 밝힌 가운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일부 나왔다.
<로이터>는 이날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오만 무스카트에서 화상으로 개최한 EU 27개국 외교장관 간 비공식 외교이사회 뒤 기자들에게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지만 국제법 및 인도주의법을 준수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며 "민간인에 물, 전기, 식량을 끊는 등의 일부 조치는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번 분쟁이 역내 전쟁으로 번질지 촉각이 곤두선 가운데 이스라엘군은 10일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로켓이 발사됐고 시리아에서 이스라엘 영토로 다수의 발사체가 날아왔다고 밝혔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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