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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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바흐를 좀 제대로 쳐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연습하다가, 연주가 나아지려면 연주 방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꿔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프로 연주자도 아닌데 뭐 그렇게 비장하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꽤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우리는 번역자이지 음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굴드나 쇼팽의 야상곡에서부터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A가 B라는 곡을 다른 곡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좋게 보지 않았다"는 틀에서부터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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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크리틱]정영목ㅣ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어떤 사람이 바흐를 좀 제대로 쳐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연습하다가, 연주가 나아지려면 연주 방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꿔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프로 연주자도 아닌데 뭐 그렇게 비장하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꽤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 또한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기술적인 면보다 더 깊은 곳이 바뀌어야 한다고 자못 비장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은 무엇보다 말을, 또 그 말을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날이 갈수록 이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물론 말이 성긴 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핵심 요인이겠지만, 그 그물의 구멍을 메우려면 지능이나 지식이나 상상만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전에 그 성긴 상태 자체를 존중하고 섬세하게 다가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그물은 약하기까지 하여 내 뜻대로 구부리거나 찢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번역 수업에서도 내 경우에는 어떤 기술보다 이런 태도의 훈련이 일차적 목표다. 얼마 전 수업에서 만난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약간 수정했다) “Gould dismissed it as sounding like a Chopin nocturne.” 이 문장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1955년 자신이 녹음한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집’ 가운데 한 변주곡(it이 가리키는 내용이다)을 훗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굴드가 쇼팽이나 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미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일단 잊는 게 좋다. 쇼팽(Chopin)과 야상곡(nocturne) 모두 생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괜찮다. 쇼팽이 음악가이고 야상곡이 음악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으면 된다. 우리는 번역자이지 음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굴드나 쇼팽의 야상곡에서부터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A가 B라는 곡을 다른 곡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좋게 보지 않았다”는 틀에서부터 다가간다. 여기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펑퍼짐하게 표현한 “dismiss”를 적절한 강도와 어감으로 잡아내는 것이 번역자의 중요한 임무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고 굴드가 쇼팽이나 야상곡을 싫어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단정하지 못한다. 굴드는 바흐가 쇼팽의 야상곡처럼 들리는 건 싫어했지만 야상곡 자체는 좋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쇼팽은 좋아해도 야상곡은 별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은 삼가야 한다. 나아가서 이 문장 자체의 진위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자의 판단을 최대한 이해하려 할 뿐, 그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자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남이 내 상태를 “화났다”라고 단순화하면 못마땅할 때가 있듯이 굴드도 이 판단을 놓고 할 말이 있을지 모른다.
번역자로서 최악의 태도는 굴드나 쇼팽이나 야상곡에 대한 기존 지식 때문에 저자가 한 말을 왜곡하는 것이다. 가령 나에게 쇼팽의 야상곡이 지상 최고의 음악이고 이제까지 그걸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면 눈에 뭐가 씐 듯 정반대로 뜻을 비틀어 버리기도 한다. 설마? 나 자신이 늘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증언할 수 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짬밥이라는 자만심 때문에, 이건 저런 거지 하는 지레짐작 때문에, 시작 지점에서 넘어진다. 그래서 맑은 눈으로 텍스트를 바라보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자신을 가다듬는다. 그것이 번역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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