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유대인은 못 살려” 냉소 딛고 ‘틱톡’ 활용 교육시설로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베를린편③]

2023. 10. 11. 18: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반제 기념관, 원래 유대인 말살 모의한 나치 수뇌부 별장
1960년대 논의 시작, 30년만에 기념관 조성
경직됐던 독일 분위기…역사 직면 꺼려
정치권서 희생자 추모하며 분위기 변화
경찰, 군인 찾는 역사적 장소로 탈바꿈
지난달 22일 오전 독일 베를린시에 있는 ‘반제 회의 기념관’에서 고등학생 요한(18) 군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베를린=박혜원 기자

[헤럴드경제(베를린)=박혜원·김빛나 기자] “이미 벌을 받은 아이들이 또 대가를 치른다고, 이미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살려낼 수는 없다” “아동복지시설 대신 복수의 기념물. 베를린에 있는 새로운 증오의 건물”.

독일 수도 베를린 고속철도 종점에 있는 호숫가 마을의 ‘반제 회의 기념관’을 두고 1966년 독일 언론들은 이렇게 비난했다. 반제 기념관은 1942년 나치 수뇌부가 유대인 말살계획을 논의했던 별장을 보존한 장소다.

이 보도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난달 22일 오전, 베를린 소재 고등학교 재학생 요한(18) 군은 지하철을 타고 홀로 이곳을 찾았다. 요한은 “독일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라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며 “젊은 세대 누구나 역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반제 기념관을 둘러싼 이 같은 간극은 어두운 역사를 적극적으로 직면한다고 알려진 독일 사회도 수십년에 걸쳐 뼈 아픈 진통을 겪어왔음을 보여준다. 반제 기념관은 지난해 방문객만 7만3000여명에 달한다. 연방 대통령 등 고위급 정치인들도 앞다퉈 찾는 역사적 장소다. 그러나 1992년 설립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었다. 연방 국회의원이 나서서 철거를 주장했을 정도다.

유대인 ‘대량 학살’ 시작점…평화로운 휴양지 속 반제 별장
반제 기념관. 아이크 스테건 반제 기념관 소속 직원은 “일부러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을 회의장소로 선정해 우리(나치 수뇌부)가 자행한 일이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 같다”는 개인 견해를 밝혔다. 베를린=박혜원 기자

독일어로 ‘호수’를 뜻하는 반제는 베를린시민이 휴가 때마다 즐겨 찾는 휴양지다. 이날 헤럴드경제가 방문한 반제 기념관 인근 호숫가에는 곳곳에 요트와 유람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나치 정부는 베를린 부호의 대저택이었던 반제 별장을 사들여 친위대 등 요직자들을 위한 휴양시설로 써왔다.

나치 수뇌부 15명은 1942년 1월 이곳 별장에 모여 90분간 유대인 말살을 위한 실무 회의를 진행했다. 유대인 없는 독일을 만들기 위한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단계, 즉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었다. 이 무렵 진행된 것이 가스실 등을 이용한 대량 학살이다. 아이크 스테건 기념관 소속 직원은 “일부러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을 회의장소로 선정해 우리(나치 수뇌부)가 자행한 일이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 같다”고 견해를 밝혔다.

독일도 격렬한 논쟁…처음엔 정치권·언론 모두 냉소
지난달 22일 아이크 스테건 반제 기념관 소속 직원이 헤럴드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베를린=박혜원 기자

정작 이곳을 기념관으로 만들기까지는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기념관 조성에 대한 정당성을 두고 각종 논란에 휩싸였던 탓이다.

폴란드 태생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역사학자 조셉 울프는 1960년대 초반, 청소년 휴양시설로 쓰이고 있던 반제 별장을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처음으로 했다. 나치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독일 내에서 이미 적극적으로 이뤄던 때였다. 그럼에도 울프는 격렬한 반발을 맞닥뜨려야 했다. 베를린 주의회 의장, 베를린시장 등 정치권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독일 사회 분위기는 역사를 둘러싼 논의가 이념 분쟁으로 번지곤 하는 한국 사회와 일견 닮은 부분이 있다. 스테건은 “전후 서독에선 나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면 ‘너 공산당이야?’ ‘왜 동독으로 안 가?’라고 묻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생존자가 불편한 문제를 계속해서 말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냉소적 반응은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1966년 일간지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은 “(기념관을 설립한다고 해서)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살려낼 순 없다”는 독자의 편지를 실었다. 게르트 퀼링 예나 프리드리히-쉴러대학 교수는 ‘학교 부속 수련원이냐, 연구시설이냐?’라는 보고서에서 이와 관련해 “아동복지에 대한 피상적인 논의 저편에는 나치의 과거를 상기하기 싫다는 거부 의식이 숨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반제 회의 50년 만에 기념관 조성
한 시민이 반제 기념관 외부에 설치된 반제 회의 관련 설명자료를 읽고 있다. 베를린=박혜원 기자

기념관은 반제 회의 50주년이었던 1992년에야 만들어졌다. 울프가 1972년 기념관 설립 무산에 대한 비관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한 뒤로부터도 20년이 지난 시점이다.

정치권에서 나치 희생자와 그에 대한 반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촉구하기 시작한 것이 발화점이었다. 퀼링 교수에 따르면 1982년 베를린 상원은 나치 희생자 추모건물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반제 별장을 추모장소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거절하다 1986년에야 반제 회의가 열렸던 장소에 한해 추모장소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테건은 “1980년대 무렵부터 정치권에서 나치 유대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목소리를 냈다”며 “학살 생존자들도 공개적으로 나와 증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경찰·군인 찾고 ‘틱톡’ 활용 교육하는 시설로 탈바꿈
반제 기념관이 운영하는 틱톡 계정. [틱톡 캡처]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반제 기념관은 오늘날 교육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경찰과 군인, 예비 법조인 등 전문직군이 주로 찾는다. 나치 정권에 특히 많이 가담했던 이 직군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유대인 수송열차를 운영했던 독일 최대 철도회사 직원들 역시 최근 이곳을 찾았다.

기념관 측에선 반제 회의 역사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틱톡’ 계정도 운영하고 있다. 스테건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치 관련 게시물을 올리는 이들이 늘어나 젊은이들의 언어로 반제 기념관에 대한 설명과 나치 역사를 알려주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백만명을 말살하는 정책을 만들었던 장소였던 반제 기념관은 역사적으로 존중을 받고, 무겁게 다뤄져야 하는 장소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헤럴드경제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은 역사적 논쟁 속에 사라지는 한국 근현대사 유적을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본 기획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기획 : 김빛나 기자
팀 구성원 : 김빛나·김영철·박지영·박혜원 기자
지원 :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전체 시리즈〉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인류역사의 수치를 공개하다



[2] 베를린편


-역사 전쟁없는 도시



〈국내편〉


[1] 근현대사 유적지도


[2] 당신이 모르는 6·25


[3] 잊힌 친일 문화 잔재


[4]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klee@heraldcorp.com

binna@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