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뛰던 경기장도 ‘나치 유적 논란’…“분쟁 끝 보존”[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베를린편④]
크리스토프 라우헛 국립 큐레이터 인터뷰
나치 문화재는 ‘불편한 유물’이라 명명
“불편하지만 지워야 하는 건 아냐”
[헤럴드경제(베를린)=김빛나·박혜원 기자] “근대문화재를 다루다 보면 당연히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나치 유적도 그렇다. 정치적 토론이나 쟁점이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정치를 따라가진 않는다. 오히려 견제하고 있다.”
독일은 근현대사 유적에 대한 진보, 보수당 정치인에게 역사를 지울지 말지를 다투는 ‘역사 전쟁’이 잦아들은 지 십수년은 족히 됐다. 독일의 문화재청 같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독일 수도 베를린의 문화재를 총괄하는 베를린문화유산보호청장 크리스토프 라우헛 국립 큐레이터에게도 ‘역사 전쟁’은 생소한 개념이다. 지난달 21일 베를린 기념물관리청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그는 “정치에 연루되지 않는다. (정치에 상관없이) 우리는 문화재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나치 유적을 보호하는 일이 여러 의미에서 쉬운 건 아니다. 라우헛 큐레이터는 “나치 유적을 ‘불편한 유물’로 정의하고 있다”며 “그래도 역사를 무시할 수 없기에 보존해야 한다. ‘나치 유적을 보존해야 하냐’는 의견이 계속 들어오고 있긴 하지만 기념물관리청에서 왜 보존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에 있는 대표적인 ‘불편한 유적’은 1936년 올림픽이 열린 올림픽 주경기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故) 손기정 선수가 참가해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던 마라톤 시상식이 열렸고, 경기장 부근에는 손 선수 동상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장은 한동안 낡은 상태로 보존되다 2000년대 초반 재건축이 이뤄졌다.
2014년 7월 열린 베를린 기념물관리청에서 발간한 독일 연방공화국 문화재 보호 연례회의에서는 경기장 재건축 당시 독일인들의 고민이 담겼다. 관리청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올림픽경기장에 대해 “2000년대 초에 이뤄진 재건축 당시 경기장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며 “새로운 관중석을 설치하는 등 나치 시대에 지어진 요소를 지우려 했으나 그럼에도 건물의 예전 부분이 아직 눈에 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나치 흔적을 지우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재건축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라우헛 큐레이터는 “2014년 논의 당시 올림픽경기장이 많이 쓰이지 않아서 이 경기장을 많이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올림픽 주경기장은 나치당이 ‘세계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진 곳’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소였다. 그래서 더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토론했다”고 말했다.
논란은 있었지만 정쟁구도가 형성되진 않는다. 경기장 하나를 보존하는 데 수많은 사람이 토론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라우헛 큐레이터는 “먼저 정치인들이나 역사학자들이 토론 주제를 언론에 많이 알린다. 그럼 사람들이 해당 주제를 생각하게 된다”며 “그럼 토론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큰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작은 질문들을 가지고 토론한다”고 말했다.
의사 결정에는 다양한 사람이 동원된다. 여기서 빠지지 않는 대상은 실제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올림픽 주경기장에는 스포츠연합 등이 참여했다. 의사결정자가 다양해지면서 이념이 침투할 틈이 없는 것이다.
나치 유적은 2023년 현재도 새롭게 발견된다. 라우헛 큐레이터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나치 유적만 수백개. 새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더 많은 유적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유적 보존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지적과 늘 싸워야 하는 어려움은 안고 간다.
재정 지원에 대해 질문하자 라우헛 큐레이터는 이마를 짚으며 “예산을 받는 건 언제나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고대 성이나 궁전은 예산을 받기 쉬운데 나치 유적은 정말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돈이 많이 든다는 문제가 있을 뿐, 안 주진 않는다. 그래도 보존한다는 것에 모두가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은 헌법에 따라 유적을 보호한다는 강력한 원칙하에 활용방안이나 전시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모든 유적을 보존한다는 원칙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역사를 직시하려는 독일인의 노력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쾨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인류역사의 수치를 공개하다
[2] 베를린편
-역사 전쟁없는 도시
〈국내편〉
[1] 근현대사 유적지도
[2] 당신이 모르는 6·25
[3] 잊힌 친일 문화 잔재
[4]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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