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규칼럼] 덴마크 취재노트를 다시 본다
'유럽의 병자' 추락할 때
북유럽서 초일류기업 등장
운일까, 준비된 경쟁력일까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19세기 오스만제국을 지칭하며 시작됐다는 이 용어는 유럽 나라 중 문제가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남유럽은 단골이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도 한 번쯤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병자'로 조롱받아도 몇 년 후엔 부활하며 저력을 보이곤 했지만 최근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브렉시트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영국과 독일의 쇠락을 알리는 기사가 쏟아진다. 에너지 혁명과 빅테크로 무장한 미국과의 격차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과거로 가득 찬 유럽엔 미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온다.
유럽 비관론이 팽배하던 차에 북유럽 덴마크에서 날아온 소식은 놀라웠다. '노보 노디스크'라는 제약사가 유럽 1위 기업에 등극했다는 뉴스였다. 수십 년간 왕좌를 지켜온 프랑스 명품기업, 독일 기술기업을 비만 치료약 '위고비' 하나로 단숨에 밀어냈다.
시가총액은 4000억달러를 돌파해 덴마크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었다. 순식간에 '노키아 모멘트'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과거 핀란드의 노키아처럼 기업 하나의 영향력이 과도하다는 경계 심리다. 그만큼 성공 스토리는 극적이다.
노보 노디스크 소식을 듣고 기자는 십수 년 전 덴마크를 취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누군가 노보 노디스크의 성공 비결을 물었다면 주저 없이 "운이 아닌 국가 경쟁력이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덴마크는 북유럽 복지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나라다. 15년 전에도 덴마크의 법인세는 한국보다 낮았고, 지금도 그렇다. 국가 경쟁력은 세계 최상위였고, 지금도 그렇다.
당시 수도 코펜하겐 인근 정부부처, 산업단지, 대학을 둘러보고 느낀 친기업 환경은 통계 숫자 이상이었다. 유럽 최대 바이오단지 메디콘에서 만난 담당자는 "부담금이 없어 실제 기업이 느끼는 부담은 의외로 낮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눈에 보이는 세금 외에 각종 부담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답변이었다.
국민의 80%가 공교육을 통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졸업생 200명 모두가 영어로 자유롭게 얘기한다"는 덴마크 약대 교수의 설명에 다국적 제약사가 몰려드는 이유를 단숨에 이해했다. "해고는 자유롭다. 실직자는 정부가 책임진다"는 정부 관료의 답변에선 자유로운 노동시장과 사회 안전망을 향한 믿음이 묻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유럽본부가 코펜하겐에 둥지를 틀었다는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취재 후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기억에 새겨진 것은 젊은 공무원의 자세였다. 민간기업 직원보다 열성적으로 취재 현장을 함께하며 적절한 통계와 사례를 찾아다니던 모습은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념과 철학이 다른 정당이 모여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정치체제는 갈등 대신 통합을 추구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정치와 정부는 민간처럼 삼류가 아닌 일류를 지향했다. 덴마크가 오랜 기간 경쟁력 최상위를 지킨 것은 민관과 정치의 합작품이다.
당시 기획 취재의 주제는 '세계는 TEE 높이기 경쟁'이었다.
신뢰(Trust) 경제적 자유(Economic Freedom) 기업가정신(Entrepreurship)이 넘치는 나라를 찾아 비결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덴마크는 첫 번째 취재 대상이었다.
2000년대 중반 여러 분야에서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유럽 강소국은 한동안 뇌리에서 잊혔다. 한국이 성장했고 경제 규모나 주변 환경이 다르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국가 경쟁력의 원천인 신뢰와 경제적 자유, 기업가정신이 나라마다 다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유럽 강소국을 샅샅이 파헤쳐볼 시간이 왔다.
[황형규 컨슈머마켓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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