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가 주는 선물”…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조용히 웃는 푸틴
이스라엘과도 우호적인 관계 유지
크렘린궁 공식 애도 표명도 안 해
우크라 전쟁서 시선 돌릴 기회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보를 두고 러시아가 중동 지역의 혼란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동맹국들의 주의를 돌리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이 이스라엘이 공격받은 데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면서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10일(현지시간) 전했다.
냉전 시기 팔레스타인을 지원했던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이스라엘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과 러시아 사이의 무비자 여행을 허용했고 2012년 모스크바의 유대인 박물관 건립도 주재했다. 2020년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 포위 공격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 10년 이상 친분을 쌓아왔다고 NYT는 전했다.
그러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지 3일이 지나도록 러시아는 이스라엘의 희생에 공식적인 애도를 표명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네타냐후 총리와 11차례나 대화를 나눴지만 이날까지 전화통화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크렘린궁은 공식 논평을 통해 “러시아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갈등 고조를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혔을 뿐 하마스를 규탄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대신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러시아를 방문한 모하메드 알수다니 이라크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번 일이 미국의 중동 정책의 실패라는 내 견해에 동의할 것”이라면서 미국이 독립 국가 건설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익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달라진 지정학적 관계가 반영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스라엘의 숙적이자 하마스의 강력한 후견자인 이란으로부터 드론 등 무기를 지원받는 러시아의 외교적 균형추가 이스라엘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하원 의원 안드레이 구률료프는 하마스의 공격 이후 텔레그램에 올린 글에서 “이스라엘이 누구의 동맹인가. 미국이다. 이란과 무슬림 세계는 누구의 동맹인가. 우리의 동맹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개인적 서운함도 푸틴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거리를 두는 이유로 꼽힌다. 푸틴 대통령은 유대인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이 나치라고 주장해왔는데, 이스라엘과 러시아 내 유대인들은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30년간 생활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를 떠난 랍비 핀카스 골드슈미트는 NYT에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푸틴을 동료로 여겨왔으나 그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를 나치독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보고 등을 돌렸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 반유대주의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러시아 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지원해온 이스라엘 비영리단체를 해산시킨 데 이어 지난 6월에는 우크라이나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우크라이나의 나치 범죄를 옹호했다며 러시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기도 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하마스의 공격이 푸틴 대통령의 생일(10월7일)에 이뤄졌다는 점을 언급하며 “하마스가 푸틴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서방이 이스라엘판 ‘9·11’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하마스의 전격적인 공격에 충격을 받은 지금 상황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과 관심을 약화시키려는 푸틴 대통령의 전략적 의도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독일 베를린 소재 싱크탱크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의 알렉산더 가부예프 국장은 “크렘린궁의 그 누구도 (이스라엘) 희생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불만’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반기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의 논평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이스라엘로 망명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또 다른 전쟁과 맞닥뜨리게 됐다며 조롱을 퍼붓고 있다. 러시아 국영방송 토크쇼 진행자인 올가 스카베예바는 “이스라엘의 무적 이미지가 무너졌다”면서 “다음은 (이스라엘로 이동 중인) 미국 항공모함 차례인가?”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여파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며 러시아에 대한 규탄을 이어가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프랑스2 TV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선 끔찍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이 비극들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엄청난 일”이라면서 “국제적 관심이 우크라이나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하마스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이번 위기는 러시아가 전 세계적으로 안정을 해치는 행동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의 영상연설에서도 하마스의 공격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똑같은 악”이라면서 “유일한 차이는 그곳에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테러 단체가 있고, 이곳에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테러 국가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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