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ISIS 광란 떠올라”…‘악의 축’ 연상시킨 바이든 연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천명 넘은 민간인들이 살육됐다. 그냥 살해된 게 아니라 살육됐다. 그 가운데 최소 14명의 미국 시민이 포함돼 있다. 자신의 몸을 던져 아이들을 지키려던 부모들은 도살됐다. 아기들이 살해됐다는 속이 뒤집히는 보고도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대규모 기습 공격이 이뤄진 지 사흘 만에 다시 연설에 나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격앙된 표정이었다. 10일(현지시각) 오전 2시24분, 바이든 대통령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대량 학살을 “순수한 악(sheer evil)”으로 규정하며 “순수하고 완전한 악이 세상에 풀릴 때가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지난 주말에 그런 시간을 겪었다”고 말했다. 또 “테러 조직 하마스의 분명한 목적은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이라며 “순전한 악의 행동으로 1천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온 가족이 학살당한 끔찍한 살해 행위를 묘사하면서 “살육”, “도살”, “피에 굶주린” 등의 표현을 거듭 쓰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특히 “여러 아기들이 살해됐다”는 표현으로 하마스가 이번 공격으로 아기들까지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하마스가 미국인도 포함된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이슬람국가(ISIS) 최악의 광란을 떠올리게 한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 등 강력한 ‘응징’뿐 아니라 하마스의 ‘박멸’에까지 힘을 실어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마스의 만행을 열거한 바이든 대통령은 “탄약과 아이언돔을 보강하기 위한 요격체 등 추가적인 군사 지원을 늘릴 것”이라며 확고한 지원 의지도 재확인했다. 또 항공모함 제럴드 포드호 전단이 이스라엘 근해로 이동했다며 “필요하면 추가 자산을 움직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개입 가능성이 나오는 이란과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를 견제하려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또 누구도 이번 사태를 이용하면 안 된다며 “한마디만 하겠다. 그러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11일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대책 논의를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할 예정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9·11 테러 뒤인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악”과의 싸움을 언급한 것을 연상시킨다. 바이든 대통령이 사태 첫날인 7일보다 훨씬 강경한 발언을 한 것은 애초 알려진 것보다 민간인 피해 규모와 양상이 더욱 심각하고 잔혹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아가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도 거론된다. 미국인이 최소 14명이나 숨진 이번 사태에 미온 대응했다간 정치적 위기에 몰릴 수 있다. 이런 점에 미국 내 유대인들 여론까지 두루 고려해 매우 수위 높은 표현을 고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편들면서도 이-팔 분쟁 때 중재자를 자임한 미국의 이전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양새를 연출했다. 하마스를 강하게 비난하면서도 가자지구 완전 봉쇄에도 반대 의견을 내놓은 유엔과 유럽연합(EU) 등의 태도와도 대조적이다.
미국은 나아가 강력한 보복을 묵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는 모든 군사작전이 법치주의와 교전규칙에 따르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히는 데 그쳤다. 현재 가자지구는 물·식량·전기 공급이 끊긴 상태이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미 900명 이상이 숨졌다. 여기에 지상군까지 투입되면 민간인 피해는 크게 늘 수밖에 없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스라엘 및 이집트 정부와 가자지구 민간인 대피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는 시도인 동시에 강공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한편 미국은 인질 석방을 위해 하마스와 간접 접촉도 모색하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블룸버그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하마스에 접근할 수 있는” 카타르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이날 이란·카타르 외교장관과 사태를 논의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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